아버님 조혁래 (趙爀來)의 일대기

 

 

 

 

 

1남2녀의 독자로 태어나서

아버님 조혁래(趙爀來, 1932-2002)는 조부모 조태원(趙兌元, 1907 -1939)과 김봉의(慶州 金鳳儀, 1908-1983) 사이에서 음력 1932년 1월15일, 남해군 남해면 입현리 376번지 섬호(蟾湖) 부락의 자택에서 태어나셨다. 여형제로는 위로 영래(永來), 아래로는 명래(命來)가 있다.

조부이신 조태원은 증조부모 조봉주(趙鳳周,1986-1968)와 정난아(晉陽 鄭蘭牙, 1885-1973)의 1남5녀 중 독자로 태어나서 집안 살림을 꾸려가다 괴질로 서른살의 젊은 나이에 요절하셨다. 조모 김봉의는 남해군 삼동면 물건리 398번지에서 김성조(金成祚)와 김항조(金項祚)의 장녀로 태어나 스무살에 조씨(咸安 趙氏) 집안으로 시집을 왔다.  

 

 

 

     (국민학교 졸업 당시, 최우등상을 받았다)

 

  (70세의 모습, 이때까지도 건강을 유지하셨다)

 

영특하지만 병치레가 잦았고

아버님은 어릴 때부터 영리하여 마을주민 뿐만 아니라 학교에서도 모든 귀여움을 독차지하였다. 특히 한학(漢學)을 하셨던 증조부의 영향으로 국민학교 입학전에 천자문(千字文)을 익혔고, 졸업할 때까지 항상 우등상을 받았다. 아버님 나이 8세에 조부님이 돌아가셨기 때문에 입학 후부터는 증조부의 그늘 아래서 성장했다. 증조부는 두명의 머슴까지 둔 대농을 꾸려갔고, 집안일은 증조모와 조모가 떠맡았다.

아버님은 조부님이 돌아가신 후부터 무척이나 병치레가 잦았다. 증조모님은 병고치는 무당까지 양어머니로 두고 집안에서 병마 귀신을 쫒아내는 무당굿을 벌리곤 했다. 필자가 태어난 후에도 그 무당 할머니는 집안에서 가끔 귀신 쫒는 굿판을 벌렸는데 우리들은 그 분을 "복골네집 할머니"라 불렀다.

16살에 결혼하고, 서울로 유학

2대째 독자로 자손 끊어질 것을 염려한 증조부는 제대로 철 들지않은 아버님을 16살이었던 중학교 3학년때 결혼을 시키게 된다. 증조부께서는 배우자의 조건으로 자식을 많이 낳은 집안의 영리한 규수를 가장 먼저 생각했는데, 어린 나이의 어머니 김권순(慶州 金權順, 1932- )은 세상 물정도 모르는 나이에 어르신들이 시키는대로 시집을 왔다.

어머님은 외조부모인 김석윤(金錫允)과 박봉지(朴奉只) 사이의 2남4녀 중 막내로 남해군 고현면 이어리 588번지에서 태어났다. 아버님께서 살아계셨을 때 들려준 이야기로는 어머님은 배운 집안의 막내 딸로서 학생시절 매우 영특하고 학교공부도 항상 일등이었다. 아버님과 같은 나이였지만 2년이 늦은 9살에 국민학교를 입학했는데, 그것도 외조부에게 끈질기게 졸라서 겨우 허락을 받았다고 했다.

집안살림이 비교적 풍족했기 때문에 아버님은 결혼 후 곧 서울로 유학을 떠나 6촌 삼촌인 조재원(趙在元)과 다른 먼 친척의 도움으로 서울공립농업중학교(현재 서울시립대)에 다니게 된다. 인정이 많아 방학 때에는 항상 어머님을 비롯한 가족에게는 아무런 선물이 없으면서도 머슴들의 옷만은 사들고 왔다고 했다. 그런데 어머님은 결혼 일년 후인 17살에 아들을 낳아 집안 어른들의 소원을 성취하게 된다.

 

 

 

 

 

국문학과에 입학한 이유는 양주동 박사 영향

사진에서 보듯이 젊은 시절의 아버님은 큰 키에(180cm), 미남이었다. 고등학교 시절(18세) 전쟁을 만나 제대로 공부할 수 있는 기회가 없었다고 회고하셨다. 부산 피난생활중 동국대 국문학과에 입학하였고, 전시를 겪으면서 서울에서 졸업하셨다. 당시 국어학계에 큰 업적을 남기고 자칭 국보급이라고 주장했던 양주동(梁柱東, 동국대 국문학과 교수) 박사를 매우 좋아했다고 자주 술회한 바 있다. 그러나 학교선택은 어린 시절부터 한학을 하셨던 증조부의 영향도 많았을 것으로 추측된다.

 

 

 

 

 

 

군복무 후 정치연설원으로 활동하기도

대학을 졸업하자 아버님께서는 곧바로 군입대를 결심하고, 제주도 훈련소 생활을 했다. 훈련이 끝나자 곧바로 강원도 철원의 휴전선 철책선 쪽에서 배치받아 군생활을 시작하지만 휴전이 이루어진 시점이어서 무난하게 3년간의 군생활을 마칠 수 있었다. 그러나 당시에도 제주도와 지리산에 빨지산 공비가 출몰했고, 경제적으로 어려운 시절이었던지라 증조부는 하나밖에 없는 손자를 보호하고자 수차례 먼 길을 면회다녔다.

아버님이 군제대할 당시 증조부모는 늙어가고 큰 집안살림을 돌볼 수 있는 어른이 없었다. 또한 서른살이 되기 전에 이미 6남매를 낳았고, 실질적인 가장으로서 고향집을 떠날 수가 없었다.

군제대 후 바로 학교 선생으로 교육계에 진출할 수 있는 기회도 있었지만 포기해야 했고, 언변이 좋아서 선거철만 되면 후보자 연설원(옛날에는 "마부"라 했던가, 지금의 비서관급)으로 요청받아 수차례 활동하는 모습을 지켜볼 수 있었다.

농촌지도자로서 자원봉사에 더 관심이 많았고

아버님께서는 주로 농촌지도자로서 젊은 시절을 보냈는데 농촌지도자연합회 회장(비상근)으로 오랫동안 봉사한 바 있다. 시골에서는 학벌이 좋고 유식하다는 평판 때문에 수차례 공직의 유혹을 받기도 하였지만, 개인 차원의 봉사활동만 참여하셨다.

 

 

 

 

 

사진은 최근 발견한 20년전의 위민봉사원증(爲民奉仕員證)이란 것인데, 뒷면에는 "이 분은 억울하고 어려운 이웃을 돕는 위민실(爲民室)에서 자원봉사하고 계시는 분입니다. 이 분의 활동에 최대한의 편의와 협조를 부탁합니다" 라고 적혀있다. 옛날 주민등록증 만큼이나 낡은 점으로 미루어 이 신분증에 무척이나 애착을 가졌던 모양이다.

[註] 부친 조혁래는 2002년 불의의 교통사고로 6개월간 고생하셨고, 병마와 싸우시다 71세로 돌아가셨다. 앞으로 친지와 형제들의 도움으로 더많은 자료가 수집된다면, 이 글을 계속 수정 보완하여 자식들에게 넘겨줄까 한다.

2003년 10월15일  조현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