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10 분쉬의학상 (국내 최고 의학상)

서울의대

정명희 교수   

  

대한의학회(회장 지제근)와 한국베링거인겔하임이 공동 주관하는 제10회 분쉬의학상 수상자로 정명희 교수(55·서울의대 약리학교실), 젊은 의학자상에는 김현아 교수(36·한림의대 내과학교실)가 선정되었다.

정명희 교수는 암을 비롯한 각종 질환 및 노화의 원인으로 추정되는 활성산소에 대한 2차적  방어 개념을 정립하는 계기를 마련하여 활성산소의 위험으로부터 유전정보 보전 기전을 세계 최초로 제시한 공로가 인정되었다. 정명희 교수와의 개인적 교분은 15년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대학원에서 약물대사의 실험기법에 관해 흥미를 느끼고, 박사학위 논문도 약리학이 관련된 『벤젠 대사산물이 조혈세포에 미치는 영향』이었는데 조혈간세포 배양계에 벤젠 대사산물을 첨가했을 때 나타나는 독성효과의 분석이었다. 이렇게 약리학교실과의 잠깐동안 인연을 맺고 정명희 교수의 연구실을 수차례 방문하였고 학위를 취득할 때까지 실험방법론에 관해 많은 조언을 받았다.

김 교수는 세계 최초로 류마티스 관절염의 관절연골에서 세포괴사가 일어난다는 사실을 밝혀내 수상하게 됐다. 특히 김현아 교수의 연구업적은 지난 해 세계에서 가장 권위있는 미국 류마티스학회지(Arthritis & Rheumatism) 6월호에 게재된 바 있다. 김현아 교수는 연구실험실 공간을 같이 사용하면서 자주 대면하는데 특출한 능력과 끊임없이 노력하는 성실성이 돋보였다. 수개월전에도 일본 류마티스학회에서 발표한 논문으로 젊은 의학자상을 수상하는 영예를 누리기도 했다.

분쉬의학상은 1990년 9월 4일 제정되어 매년  연구업적이 뛰어난 의학자 한명을 선정하여 상금 2천만원과 상패 및 메달을 수여해 왔는데, 10주년을 맞는 올해부터는『젊은 의학자상』을 신설하였다. 시상식은 2000년 11월23일 신라호텔에서 의학계의 많은 저명인사들이 참석한 가운데 성대하게 거행되었다. 한림대의료원에서는 노관택 의료원장, 장우현 한림의대 학장, 유재영 내과학교실 주임교수 및 본인이 축하객으로 참석했다. [2000년 11월 25일, 조현찬]

 

한림의대

김현아 교수   

 

 


조선일보 인터뷰 기사

 "관절염 원인 규명에 승부 결었죠"

대한의학회가 수여하는 「분쉬의학상」 젊은의학자상 수상자로 선정된 한림대 김현아(36·강동성심병원 류머티스내과) 교수는 『관절염으로 인해 연골이 망가지는 과정을 규명하는 데 있어 연골세포 자체에 초점을 맞춘 제 연구의 독창성이 인정 받은 것 같다』고 말했다.

분쉬의학상은 고종 황제의 시의를 지낸 독일인 의사 리하르트 분쉬 박사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제정한 상. 올해부터 젊은의학자상을 제정, 첫 수상자로 김 교수가 선정됐다.

지난 5월 일본 류마티스학회에서도 젊은의학자상을 수상한 김 교수는 83년 대입학력고사 여자 자연계 수석에서부터 시험이라면 운전면허 필기시험, 류마티스 전문의 시험까지 1등을 놓쳐본 적이 없는 전형적인 공부 벌레. 94년 서울대병원에서 내과전문의를 취득한 이후 줄곧 류머티스 관절염 연구에 매달렸고, 96년 미국 클리브랜드 케이스 웨스턴 리저브대에서 2년간 연골세포에 대한 연구를 본격적으로 했다. 지난해에는 한국인 저자 단독으로 처음 미국 류마티스학회지에 논문이 실렸다. 미국 연수 소감을 담은 「나는 미국이 싫다」(중앙M&B)라는 책도 펴내 화제를 모은 주인공.

이번에 수상한 논문은 「류머티스 관절염에서 연골세포의 고사」. 지금까지 관절염 진행 과정에 대한 연구는 연골세포를 둘러싼 관절의 기질이 녹아 없어지는 데 초점이 맞춰졌으나, 김 교수는 연골세포 자체가 고사되면서 관절염이 진행된다고 밝혔다. 그는 『연골세포의 고사 과정이 완전히 규명되면 이를 늦추는 약물 개발이 쉬워질 것』이라며 『앞으로는 어떠한 신호전달체계로 연골세포가 고사되는 지를 연구할 계획』이라고 했다.

『아직도 많은 관절염 환자들이 정확한 진단없이 아무 약이나 사먹거나 비방에 매달려 가산을 탕진합니다. 관절염을 완치하겠다는 생각보다는 꾸준히 관리하는 자세가 필요하지요.』[조선일보 김철중 기자]

 

분쉬의학상의 역사와 의의

 

한국 의학의 학술연구 분야의 발전과 한국, 독일 양국의 의학분야에서의 친선 증진을 위해 한국 베링거 인겔하임사와 대한의학회가 공동 제정한 "분쉬의학상"은 당시 세계의학계에서 선도적 역할을 하던 독일의학을 한국에 전수하여 오늘날 한국 의학발전에 주춧돌 역할을 한 구한말 최초의 독일인의사 분쉬 (Dr. R. Wunsch, 1869-1911)를 기리는 뜻에서 명명하였다.


리하르트 분쉬 (Dr. R. Wunsch)는 1869년 독일 슐레지엔 지방의 히루수베르크에서 제지공장을 경영하던 공장주의 아들로 태어났다. 1894년 그라이프스발트 대학에서 의학박사 학위를 받은 뒤 당시 저명한 외과의였던 피르호 교수 아래서 수련의로 일했으며, 헬페리히 교수의 추천과 도쿄 대학 내과 교수로 재직중이던 벨츠 박사의 주선으로 1901년 11월 고종의 시의로서 한국에 왔으며, 개인진료소를 열어 민간 의료활동도 했으나,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인들이 한국 정치를 주도하면서 박사에게 시의자리에서 물러날 것을 종용한다. 그러자 1905 년 4월 일본으로 건너가 벨츠박사의 후임자리를 기다렸으나 여의치 않아 유럽으로 돌아갔다가 1908년 독일의 조차지였던 중국 교주의 청도로 가서 활동하다 1911년 장티푸스에 걸려 마흔 한 살의 나이로 그 곳에서 생을 마쳤다.

 



10 맞은 분쉬의학상
국내최고
의학상으로 자리매김.  분쉬 박사의 업적과 공로, 재조명 계기 마련

땅에 서양의 근대의학이 전래된 것은 1885(고종 22) 미국인 선교사이며 의사인 알렌(Horace N. Allen) 의해서였다. 알렌은 갑신정변(甲申政變) 와중에 중상을 입은 집권층 실세인 민영익(閔泳翊) 치료한 것이 인연이 고종황제의 신임을 얻어 광혜원(廣惠院) 설립하게 됐다.

알렌이 서양의학을 소개하는 단초를 열었다면 한국의 의학발전에 디딤돌을 마련했던 하나의 의사가 있었다. 1901 고종황제 시의(侍醫) 내한해 당시 세계의술의 선도적 위치에 있던 독일의학을 한국에 전수했던 최초의 독일인 의사 리하르트 분쉬(Richard Wunsch·한국명 富彦士·18691911) 바로 그다.

일본 황실의 시의이자 도쿄(東京)대학 교수였던 독일 의사 벨츠 박사의 주선으로 고종의 시의가 분쉬는 오후 56시에 궁에 들어가 진료를 했으며 시간이 남으면 괴테의 소설을 읽거나 온돌방에서 측근 신하들에게 서양 문물이야기를 하며 시간을 보냈다. 고종이 자주 감기를 앓는 원인으로 집무실의 비과학적인 난방구조와 입고 있는 비단옷의 열전도문제 등을 지적하기도 했다.

그러나 고종 황제가 분쉬를 시의로 것은 황실의 권위를 대외에 과시하려는 의미가 컸기 때문에, 그가 궁중에서 일은 별로 없었다. 상황판단을 위해 날마다 입궐해 분위기를 파악하는 일과였고 몇몇 환관이 가끔 사소한 흉터를 없앨 있는지 묻는 고작이었다. 대신 그는 당시 서울에서 살고 있는 외국인들이나 일반 한국인들을 많이 치료했다. 무엇보다도 없고 없는 일반 백성들을 진료했다는 사실이 그의 활동 가운데 가장 빛나는 부분이다. 당시 한국인들은 진료비 개념이 없었기 때문에 그가 받은 치료비라고는 달걀, 참외가 고작이었다. 당시 진료비와 관련해 그의 일기를 살펴보면,

"최근에 한국 산모의 아기를 처음으로 받았습니다. 일은 아주 보기드문 새로운 뉴스감입니다. 한국 여인은 남자 의사의 진찰을 받거나 도움을 받기보다는 차라리 죽는 낫다고 생각하니까요. 이번 경우는 신열이 있고 진통이 3 동안 계속되는 난산이었는데…… 한국 여인의 해산을 도와준 대가로 참외 개를 받았다는 점을 말씀드려야겠습니다.(1902 8 16 )

그러나 그는 “의술을 사랑하니 건실하게 무료로 봉사하면서 수술하는 법을 잊지 않으려고 연습하는 셈”이라고 자위했다. 그는 서울에 체류한 의사 가운데 외과수술에 가장 탁월한 것으로 평가받았다. 금테 안경을 그는 당시 「수술은 富彦士(분쉬)」란 말이 있을 정도로 가장 인기 있던 의사였다.

또한 그는 근대적인 방역대책을 처음으로 입안, 실행했던 의료정책가이기도 했다. 1902 서울에 육군위생병원이 설립되자 캐나다인 의사 에이비슨(Oliver R. Avision) 일본인 의사와 함께 고문으로 위촉받은 그는 여름 콜레라가 만연하자 보건정책과 방역대책을 수립하는 영향을 미쳤다. 콜레라 방역에 필요한 여러 항목을 구체적으로 열거한 아래와 같은 내용의 건의문을 내부대신에게 건의하기도 했다.

배수로와 하수구를 적어도 매주 2 청소하고 석회수로 깨끗이 닦아야 합니다.
군인을 포함한 궁내의 모든 사람은 반드시 볼일을 화장실에서 봐야 합니다.

의료 전반에 걸친 그의 활동은 현대의학을 땅에 정착시키는 초석노릇을 셈이다. 사실 그는 현대식 병원을 설립하고 의학교육을 실시하기 위해 한국정부의 재정후원을 얻으려고 오랫동안 노력했다. 그러나 여러 가지 복잡한 정치상황과 정부의 무능함 때문에 그의 꿈은 쉽사리 성사되지 못했다. 그러다가 1905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이 한국의 주도권을 장악하면서 궁중 시의였던 그의 출국을 종용하는 바람에 그는 완전히 꿈을 접어야 했다.

성격이 매우 치밀했던 것으로 보이는 그는 한국에 머물렀던 4 동안의 경험들을 꼼꼼하게 일기 또는 서신, 사진으로 남겼다. 그가 남긴 당시 한국의 사회상과 열강들의 각축 상황 등에 관한 기록들은 의학사나 우편사 뿐만 아니라 구한말 정부와 외세의 관계, 정치적·사회적 상황을 이해하는 대단히 유익한 사료라는 점에서 적잖은 의미가 있다. 그의 편지와 일기들은 그가 타계한 65 만인 1976 그의 (게르트루트 클라우센 분쉬) 의해 출판됐다(한국에선 학고재가 지난 1999 『고종의 독일인 의사 분쉬』란 이름으로 번역, 출간).

……제가 차린 진료소는 되고 있습니다. 환자가 매일 서른 이상 찾아오고 있으며 그들에게 약을 지어줍니다. 그러고도 정부는 보조금을 푼도 주지 않습니다. 찾아오는 환자들 대부분은 약값을 치를 돈조차 없는 지경이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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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4 9 18 분쉬박사의 편지 (『고종의 독일인 의사 분쉬』에서)

그의 눈에 비친 우리나라는, 정치는 어지럽고 황제는 무능하며 백성들은 가난하고 무지했지만 참으로 공기 맑고 아름다운 나라였다. 고종의 시의로 였던 그는 돈없고 힘없는 일반 백성들의 진료에도 정성을 기울였다.그의 눈에 비친 우리나라는, 정치는 어지럽고 황제는 무능하며 백성들은 가난하고 무지했지만 참으로 공기 맑고 아름다운 나라였다. 고종의 시의로 였던 그는 돈없고 힘없는 일반 백성들의 진료에도 정성을 기울였다.

그가 가족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생명이 위독한 산모를 치료해 대가로 참외 개를 받은 적도 있었다고. 당시 「외과수술은 분쉬」란 말이 나돌 정도로 그는 서울에서 가장 인기 있는 독일인 의사였다. 특히 1902 초가을 콜레라가 만연하자 발벗고 보건정책과 방역대책에 영향을 미쳤다. 우리나라 현대의학 발전에 초석노릇을 것이다.

연세대 허갑범 교수(대통령주치의) 후학들에게 “질병만 치료하는 소의(小醫)보다 사람을 치료하는 중의(中醫), 나아가 국가를 위해 일을 하는 대의(大醫) 길을 걸어야 한다”고 말하고“양의(洋醫) 대통령 주치의의 원조인 분쉬는 서민을 위한 의료봉사에 힘쓰다 1911 장티푸스에 걸려 마흔 둘의 나이에 생을 마감한 진정한 대의였다”고 평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