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명(靑溟) 임창순(任昌淳) 先生

 

 

한글을 배우기 전 6살때 漢字를 접하고 千字文과 書藝를 깨우치게된 것은 항시 漢學書를 가까이 하셨던 曾祖父 때문이었다. 그러나 오늘날 國漢文 混用派라고 논리를 세우면서 문서작성시 漢字 사용을 어려워하지 않게 된 연유는 서울大學校 文理科大學 醫豫科 시절의 짧은 기간이나마 靑溟 任昌淳 선생을 뵙게된 후부터이다.

남들보다 일찍 漢文을 접할 수는 있었지만 초중고를 거치면서 여느 아이들과 마찬가지로 공부보다 놀기를 좋아했고, 연속되는 입시전쟁으로 한문 실력을 배가시킬 수가 없었다. 그런데 1971년초 대학 입학 후 漢字 實力을 검정할 기회가 있었는데 당시 千字는 대부분 解讀 뿐만 아니라 쓸 수 있었고, 2천자까지도 여전히 해독할 수 있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 정도의 한자 실력이면 國文學科 講義를 받는데 큰 지장이 없겠다는 자신감으로 國文學科 강의실을 들락거렸다.

漢文 관련 강좌는 國文學科 高學年의 필수과목이었지만 큰 노력 없이도 학점은 얻을 수 있겠다는 생각에 中國古典講讀을 선택하여 수강하였다. 이 과목은 任昌淳 客員敎授(현재 시간강사급)가 담당했는데, 講座를 선택하기 전에는 靑溟 任昌淳 敎授에 대해서 전혀 아는 바가 없었다. 당시 靑溟 任昌淳 교수는 50대의 중반의 나이였는데 항상 긴 백발에 한복을 입으셨고, 중후한 老敎授의 모습으로 각인되었다. 교과서 없이 진행하는 靑溟 任昌淳 교수의 강의는 唐詩를 하나씩 풀이하는 칠판 강의였지만 개인적으로는 매우 흥미진지하였다. 또한 唐詩를 외우고 뜻을 음미하는 것 자체가 무척이나 재미있었기 때문에 강의내용은 대부분 그대로 암기하였고, 배운 것을 그대로 적어내는 시험에서도 당연히 최상의 학점을 받았다.

靑溟 任昌淳 교수가 漢學者뿐만 아니라 金石學者, 書藝家란 사실과 4.19 敎授團 시위를 주동했고, 2년 후에는 군사정부의 압력으로 成均館大에서 강제해직을 당했다는 사실은 몇번의 강의가 진행된 후에야 알았다. 강제해직의 사유인즉 동대문운동장 옆에 있었던 한개의 기념비 사건 때문이라 했다. 당시 서울운동장 뒷편에는 李朝末 國運이 기울어갈 무렵 大院君이 중국에 잡혀간 것을 기념하는(?) 친화비(親華碑)가 있었는데, 이러한 치욕적인 기념비가 어떻게 서울 중심부에 버젓히 서있을 수 있느냐면서 당시 학생들과 함께 망치로 파괴해 버렸다고 증언했다. (아래 후학의 글 속에서는 民主自主統一協會 문제 때문에 5.16 군사정부의 압력으로 사직했음을 주장하고 있음)

漢學界의 거두이신 靑溟 任昌淳 先生은 1914년 忠北 玉泉에서 출생하셨고, 일제 때 보은관 선정서숙에서 한학을 익힌 뒤 大邱師範大 專任講士를 거쳐 54년부터 62년까지 成均館大 史學科 敎授를 지냈다. 성균관대 재직중이던 1960년 4.19 혁명 때엔 젊은 학생들의 피를 헛되이 해서는 안된다며 4월 26일 대학교수들의 시위를 주도했다. 5.16 이후 敎授職에서 해직된 후 民族自主統一委員會에서 남북 평화통일을 위한 활동을 한 그는 64년에는 人革黨 사건으로 옥고를 치렀으며, 그뒤 70년대 말까지 주요 사찰대상이었다. 하지만 한학 연구에 대한 탁월한 공로로 1979년에는 寶管 文化勳章을 받기도 했다. 98년엔 사재를 털어 淸明文化財團을 설립하고 계간 <統一時論>을 펴내는 등 통일운동에 대한 관심을 끝까지 놓지 않았다.

63년에 선생이 설립한 泰東古典硏究所는 尹德善 翰林大 前理事長의 재정적 지원을 받으면서 翰林大學 附屬 硏究所로 커왔으며, 선생은 文化財委員長(1995), 韓國國樂振興院 理事(1996), 淸明文化財團 理事長(1998)을 지냈고, 1979년에는 寶管 文化勳章을 받으셨다.

그 동안 靑溟 任昌淳 先生을 泰東古典硏究所가 위치한 경기도 남양주 芝谷書堂에서 그리고 大學에서 몇번 만나뵈올 기회는 있었지만 피일파일 미루어오다가 99년 4월 15일 신문지상에서 持病으로 별세했다는 안타까운 소식을 접했다. 영면하신 후 지근거리에서 모습이나마 떠올리기 위해 선생을 모신 S병원을 찾아 문상하고, 後學들이 남긴 靑溟 任昌淳 선생의 足跡을 만나본다. [주] 漢學을 하는 사람들은 통상적인 인식과 달리 스승을 흔히 선생이란 호칭으로 사용하고 있음.

    [1999년 4월 15일, 조현찬]

 

  태동고전연구소(泰東古典硏究所)

  지곡서당(芝谷書堂)의 고전학습

     

  • "맑은 강(講)으로 선인과 대화한다"

남양주군 수동면 지둔리에 있는 지곡서당(芝谷書堂)은 앞으로 충룡산 의 정기가 이어지고 그 사이로 작은 내가 흐르는 경치 좋은 곳에 자리 하고 있다. 서당 하면 지리산 청학동의 서당과 같이 고풍스런 한옥에 머리를 땋아 내리고 천자문을 외는 학동들을 상상하기 마련이다. 그러 나 지곡서당에 도착하면 보통의 빈곤한 상상력에 웃음을 지을 것이다.

아담한 현대식 3층 건물 앞에서 족구를 하는, 젊지도 늙지도 않은 학 생들을 먼저 볼 수 있다. 옛날 서당 모습을 한 청류헌은 지금은 일부 학생들의 기숙사가 되었고 선생들의 서재였던 문장각도 새 건물의 도서관으로 옮겨졌다. 한림대학교 부설 고전 연구소인 지곡서당은 학문적으로 한문을 필요로 하는 사람을 위한 곳인데 철학, 역사학, 중문학, 한문학, 경제학 등 인문계 학생들이 대부분인 연수생은 전공 공부에 필요해서 서당에 지원했다 한다. 여기에서는 「사서삼경」을 기본으로 고전 및 역사를 배운다.

총 3년 과정 중 1학년의 수업은 '강(講)'을 중심으로 이루어진다. 강이라 함은 옛날 서당에서처럼 지난 시간에 배운 내용을 수업 시작하기 전에 선생님 앞에서 외는 것을 말하는데 생각만큼 쉽지 않다고 한다. 물론 잘하는 학생들도 있지만 그렇지 못한 학생들도 있기 마련인데 큰 선생님에게 혼나지 않으려면 열심히 복습하는 것 외에 요령도 필요하단다. 선배들의 오랜 경험으로부터 나온 이 요령에는 몇 가지 유형이 있다.

이를 테면 철면피 형이 그 하나인데 더듬거려도 큰 목소리로 성의껏 외며 몸으로 때우는 부류이다. 그리고 동정유발 형은 가냘픈 목소리로 선생님의 눈치를 봐가며 애쓰고 있다는 모습을 최대한 표출해서 선생 님의 측은지심을 유발시키는 경우이다. 약 3만 8000자 가량 되는 「맹자」는 한 번 읽는데만 네 시간이 걸린 다고 하니 그 어려움이 어느 정도인지 가히 짐작할 만하다. 이 공부 량을 생각하면 1학년 때는 하루 종일을 강하면서 보내다시피 해야 하므로 서당을 자주 떠나기가 그리 쉽지 않다. 강하는 것을 2학년의 이 동인 씨에게 조금만 들려달라고 청하였다. "子曰 不曰 如知何之何者, 吾末如之何己.(「논어」중에서, 공자가 말씀 하시기를 어찌할 것인가 어찌할 것인가라고 말하는 자는 나 또한 어찌 할 수 없다). 운율을 넣어 읽는 모습이 차분하고 안정돼 보인다.

2학년이 되면 「시경」과 초서를 공부한다. 이때부터는 외는 것보다 그 의미 파악에 중점을 두므로 대학(원)의 강의와 병행하는 학생도 있다. 대부분의 고문서가 초서로 씌어 있기 때문에 해독을 위해서는 그 공부가 필수적이다. 교재로는 손과정의 「서보」를 활용한다.  그리고 연수 마지막인 3학년 과정에서는 「서경」「춘추」등을 공부한다. 총 28명의 학생들은 기숙사 생활을 하며 수업 이외의 모든 것을 스스로 꾸려가는데 여느 대학과 큰 차이가 없다. 신입생 오리엔테이션 에서부터 엠티, 체육 대회 등에 이르기까지 시설부, 학술부, 문화부, 체육부, 복사부(복사기 및 컴퓨터 관리) 등 각 부서와 회계, 총무, 반장 등의 역할이 잘 분담되어 있다. 식당 운영은 1학년이 전담하는데 식단도 짜고 장도 봐오고 한다. 자칭 '베스트 쿡'인 손영남 씨는 특히 자신의 김치찌개와 돼지불고기 요리 솜씨를 새내기에게 꼭 전수하고 싶단다.

산골에서 공부하며 겪는 어려움을 물으니 김만일 선생이 옛날 얘기를 들려준다. 지금처럼 현대식 건물이 세워지기 10여 년 전에는 겨울에 뜨거운 물이 나오지 않아 서당이었던 청류헌에서 목욕을 한 번 하자면 가마솥에 군불을 때거나 그것도 여의치 않으면 몇몇 학생들이 함께 마 석까지 나가야 했다. 그것을 학생들끼리는 '작전'이라 불렀다 한다.

이밖의 것에 대해서는 조성진 씨가 '장학금에서 식비나 생활비로 이것 저것 제하면 박봉'이라며 넌지시 어려움을 비쳤지만 이미 예상하고 들 어온 터라 어려움을 어려움으로만 여기지는 않는 것 같다. 그래서인지 이들의 말 한 마디 한 마디는 약간 어눌한 듯하면서도 지혜가 스며 있 고, 또 그런가 하면 가장 수준 높은 코미디 같기도 하다. "한문도 영어 같은 외국어와 마찬가지로 공부해야 해. 역사를 하든 철 학, 문학, 법률, 음악, 하다 못해 음식을 공부하더라도 전통을 알기 위 해선 한문을 공부해야지."

흰 머리에 푸근한 웃음을 머금은 임창순 선생은 한문의 필요성에 대해 이렇게 얘기한다. 곧 우리 생활과 밀접히 관련되어 있는데 이것을 외 면한다면 사회의 발전을 도모할 수 없다는 것이다. 판소리 「춘향가」 를 예로 들며 오독의 경우를 전해준다. "산학이 자명하고 음풍이 노호하여… 이것을 산학이 대명하고 이러는 데 산의 학이 크게 울고가 아니지. 산학의 그림자가 물에 잠겨 있고 그래야 하는데…." 이것이 곧 한문을 잘 모르는 지금 우리의 실태라는 지적이다. 그렇다고 해서 모두가 한문을 읽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다. 살면서 한문을 쓰지 않는 보통 사람들이야 공부할 필요가 없고 학문적 으로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영어를 공부하듯이 배워야 한다는 점을 강 조한다. 물론 한문 공부라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며 학생들로서도 바 깥에서 노동하는 것 이상으로 어렵다고 말한다.

마침 새내기 오리엔테이션을 볼 수 있었다. 올해는 열 명이 새롭게 서 당 공부를 시작하게 되었는데 예년의 7, 8명에 비해 많은 편이라고. 이 들은 한문과 영어, 논술 세 과목의 입학 시험에서 4대 1이라는 경쟁률 을 뚫고 선발된 그야말로 소수 정예인 셈이다. 전라도 고흥, 경상도 칠곡 등 전국 각지에서 올라온 새내기들은 선배들과 같이 서당 적응 훈 련을 받는데 여느 대학 새내기들처럼 호기심과 활기에 차 있었다. 선 배들 이름이 적힌 쪽지를 한 번 보고 이름 맞추기 등의 게임을 즐기며 벌칙으로 술을 먹고 노래하는 그들의 모습은 즐거움에 겹다.

'고등학교 때 선생님의 말씀에 따르면 경제학과에서는 경세제민(經世濟 民)을 가르쳐줘야 되는데 이코노믹스를 가르치더라'며 앞으로 선배들에게 견마지로(犬馬之勞)의 충성을 다 바치겠다'는 전종욱 씨처럼 새내기 열명의 입학 동기와 각오는 다양하고 재미있기도 하다. 여학생은 단 둘뿐인데 동양사 공부가 목적인 정상분 씨나 고독한 자아 로부터 탈피하기 위해서 입학했다는 강주란 씨나 막걸리 들이키며 어 울려 농을 하는 면에서는 남자들과 별반 차이가 없다. 지곡서당은 한문의 본 고장인 중국에도, 그리고 일본에도 없는 아시아 에서 유일한 한문 교육의 장이다. 사서 삼경을 가르치는 곳은 여기뿐 이라고 한다. 전통과 현대를 접목시키려는 노력들이 아쉬운 이 때 이 같은 교육 기관이 더 많이 생겼으면 하는 바람이다.

    김정규(시립대 행정학과 88)


     

   청명(靑溟) 임창순 선생 추모기

  늘 청명했던 나무 그 영원한 젊음에의 기억

 

청명(靑溟) 임창순. 젊은이들에게는 낯선 이 한학계의 거두는 지난 사월 타계하였다 이에 『成均』은 한학에 대한 연구와 실천적인 삶 그리고 큰 스승으로서 한 생을 마감한 이 노학자의 삶을 되돌아보려 한다. 선생은 많으나 스승은 드물고 말은 많되 실천은 드문 현실이다. 청명(靑溟)이 남기고 간 자취가 오늘을 사는 청년 심산 모두에게 성찰의 계기를 주었으면 한다.

“마석에서 춘천으로 가는 좋은 길을 버리고 동쪽으로 난 사잇길을 따라 12㎞쯤 달려오십시오”. 청명 임창순 선생의 온기를 더듬기 위해 가는 길이다. 마석에서 버스를 타고 좀더 들어가면 수동면 지곡리에 선생이 남기고 가신 지곡 서당과 태동고전연구소가 눈에 들어온다. 임창순 선생. 올해 4월 12일, 85년의 생을 마감하신 선생의 온기가 아직 이 곳 서당에는 고스란히 남아 있으리라. 지곡 서당이 위치한 이 지둔리 골짜기의 푸르름만큼이나 깊은 선생의 자취가 여기에 남겨져 있으리라. 우리는 과연 그것을 찾을 수 있을까?

지곡 서당은 한학자를 양성하기 위해 임창순 선생이 사재를 털어 시작한 곳이다. 대학 졸업자들을 대상으로 한 해에 열 명 정도를 뽑는데 그들은 장학금을 받고 3년 동안 이 곳에서 거주하며 공부를 한다. 선생은 진보적 한학자였다. 그것은 이 태동 고전 연구소를 설립하며 남기신 설립 취지, 곧 “한문을 가르친다고 해서 옛날 윤리 도덕을 다시 살린다거나 소위 ‘유학=성리학’ 이라는 학문을 공부하는 곳은 아니다. 현재 한국에 관한 학문 또는 동방의 한자 문화권에 대한 역사, 문학, 기타 전통적인 학문을 하려면 그 근본 자료는 모두가 한문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한문을 제대로 읽지 않고서는 그 자료를 다룰 수가 없다. 그렇기에 학문하는 사람을 위하여 이런 교육 기관이 절대 필요하다”는 말씀에서도 잘 드러난다.

학문을 향한 열정어린 노력 1914년 충북 옥천에서 태어난 임창순 선생은 유달리 손자를 아끼시던 할아버지에게서 천자문을 배우며 한문을 처음으로 접했다. 조부가 돌아가시고 가난한 집안 사정으로 학교를 다닐 엄두를 못 내다가 14세 때 가난한 학생들에게 숙식을 제공하며 한문을 가르치는 관선정 서당을 만나게 되고 그 때부터 사서 삼경을 배우고 작문을 지으며 팔십 평생을 몸담게 될 한학의 길로 본격적으로 접어들었다. 하지만 일제 시대, 어지러운 나라 사정은 특히나 선량한 백성들을 비켜가지 않는 법이고 스무 살의 갓 쓰고 버선 신은 이 청년 역시 가난한 집안 사정으로 더 이상 글 읽는 즐거움을 탐할 수만은 없었다.

스무 살 되던 해 서당을 떠난 그는 농사지을 땅도 없는 상황이라 품팔이를 시작으로 식민지 시대 노동자의 삶에 들어선다. 공사장에서 자갈을 고르고 흙을 지게로 나르고 채소 장사, 신 고치는 일 등 닥치는 대로 일을 했다. 그래도 가난을 벗어나기란 쉽지 않았다. “나는 젊어서 어렵게 지냈기 때문에 천한 일을 잘하는 것이 많다”고 말했던 공자의 젊은 시절이 잠시 스쳐 지나간다. 그 후 평소 한문 공부 외에 틈틈이 독학한 국어와 국사 실력으로 중등 교원 자격 시험을 보고 국사과 수석, 국어과 차석으로 합격하면서 선생의 가르치는 삶은 시작되었다. 선생은 이 후에 대구사범학교를 거쳐 국사편찬위원회 일에 관여도 하고 동양한의과대학(경희대 한의대 전신) 전임강사를 지내다 나중에 성균관대학교로 자리를 옮겼다. 논문을 통해 교수 자격을 획득한 것도 그 때다. 자신의 교수 자격을 심의위원회에 맡기는 일은 싫었지만 그렇지 않으면 자꾸 시간강사로 끌어내리는 통에 억지로 치른 교수 자격 심의였다.

양심적 지식인으로서의 청명(靑溟)의 편력 4.19가 일어났다. 제자들의 죽음을 그냥 모른 척 넘길 수가 없었다. 25일 교수단 시위가 일어났고 “학생들의 피에 보답하라”는 큰 플랜카드 뒤로 대형 태극기가 따르고 백여 명의 교수들이 그 뒤를 이어 거리로 나왔다. 플래카드의 글씨뿐만이 아니라 성명서에 ‘이승만 하야’ 조항을 넣은 것이나, 거리에서 점잖은 교수님들을 설득해 “학생들에 피에 보답하라”는 구호를 외치기 시작한 것도 선생이었다. 교수단 데모 다음 날로 대통령이 하야 성명을 내어 다들 교수단 시위를 대단한 것으로 평가했지만 그 때 선생은 생각이 달랐다. “학생들은 목숨 내놓고 했지만 교수단은 안전 보장 받아 가면서 한 건데…. 학생들의 투쟁에 비하면 그다지 공을 내세울 것이 못 되지…”

이후에도 선생은 학내 재단 비리가 있을 때마다 목소리를 내셨고 통일 문제에도 각별한 관심을 가져 ‘민족자주통일협회’(이하 민자통)에 참가하는 등 현실 문제와 부딪칠 때마다 피해가지 않았다. 그러나 결국 5.16 군사 쿠데타 이후 사직 압력을 받은 선생은 그 이듬해인 1962년에 사직서를 쓰고 강단을 떠나셨다.

그 후 1964년 인혁당 사건으로 감옥살이를 하기도 했고 민자통과 연루된 다른 교수들이 다 학교로 돌아가는데도 그는 끝내 대학 강단으로 되돌아갈 수 없었다. 선생은 생전에 “강제 해직은 맨 처음 나를 쩔쩔매게 만들었다”고 하셨다. 옳다고 생각되는 일은 누가 뭐래도 주저하지 않았다. 하지만 아직 가르쳐 줘야 할 것이 너무 많은데 갑자기 그 길이 막혀 버린 것은 그에게 적잖은 충격이었을 것이다. ‘아무나 나서서 가슴을 헤집고 든 지식 다 파내 갔으면 싶었’을 그 안타까움이 감히 느껴진다. 그러나 선생의 일은 어쩌면 강단을 떠난 후부터 시작되었는지도 모르겠다. 글을 배우겠다는 학생들이 찾아왔고 하루 한 시간씩 장소를 빌려 강의를 시작했다. 그것이 태동고전연구소의 시작이었다.

강의 공간을 마련할 돈이 없어 여기저기 옮겨 다니면서 강의를 했지만 서당을 지어 옮길 때까지 사, 오천 명을 수강시켰다. 그러나 양적으로 많은 수강생보다는 자신의 가슴 속에 깊이 든 학문을 옮겨 줄 이가 아쉬웠다. 한학자 양성을 위해서는 대학 졸업한 사람을 뽑아 장학금 주고 일정한 기간을 집중적으로 공부시켜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곡 서당은 선생이 주려 했던 한학에 대한 애정과 가르침이, 그리고 제자들이 찾으려 했던 배움이 함께 만든 곳이다. 지곡 서당이 들어서면서 지둔리 골짜기에는 강(講)이 울려 퍼졌다. 강(講)은 강의(講義)의 준말로 ‘외우고 이해한다’는 뜻이다. 매 수업이 끝나고 외워서 다음 수업 시간 전에 강을 본다고 한다. 하루 배운 양을 소화해 내는 것은 그리 힘들지 않지만 그게 쌓이고 책 한 권이 끝나면 그 양은 엄청나다. 처음 읽을 때는 괜찮지만 몇 번 읽다 보면 목이 쉬고 침이 마르고 입술이 바싹 탄다. 이 곳에서 거주하는 삼 년 동안 학생들은 오로지 공부에만 전념해야 한다. 물론 외우지 못했다고 혼내는 법은 없으셨다. 하지만 아무 말씀이 없어도 사람들은 알아서 그만두었다. 그것이 이 곳의 관행이다. 제자들에 대한 스승의 기대가 크기 때문이리라.

그렇게 과정을 마친 제자들이 지금은 130여 명이 된다. 청명 선생은 무사히 공부를 마친 제자들을 장한 사람들이고 귀한 사람들이라며 무척 대견스러워하셨다. 그리고 사회 각계에서 현실의 부당함에 대해 당당히 목소리를 내는 제자들의 이름을 들을 때 그는 “그래도 잘 가르쳤구나”라는 한 마디를 하셨다. 현실 문제에 참여해야 한다고 소리내어 가르치시진 않았다. 다만 그 자신이 몸소 그렇게 평생을 살아오셨을 뿐이다. 그 스승 밑에서 학생들은 그저 글만 읽으면 되었다. 모든 장학 경비를 선생 사비로 부담하던 지곡 서당 초기, 먹는 것 자는 것 등 공부 외의 모든 걱정은 스승의 몫이었다. 지곡 서당 초기 졸업생들은 ‘대학까지 나온 젊은이들이 왜 돈 쓸 곳이 없겠냐’며, 행여 공부하는 제자들이 학비 걱정으로 잡념이 생길까 봐 사재를 털어 꼬박꼬박 장학금을 주시고 자신이 없으면 빚을 내더라도 제자들의 장학금은 거르지 않으셨던 스승의 모습을 기억하고 있다.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선생의 학문적 조예 청명 선생은 한학뿐만이 아니라 금석학을 비롯해 미술, 서예 등 그 폭이나 깊이를 헤아릴 수 없는 분이었다. 중국 그 넓은 땅에 ‘비림’이라는 곳이 있다. 걸어도 걸어도 끝없이 비석들이 늘어서 있는 비림. 제자들과 함께 그 비석 사이를 걸어가시는 선생의 눈은 빛났다. 끝없는 비석의 길에서 임창순 옹의 깊은 감식안은 유난히 빛났고 중국 비림의 비석을 연구하는 학자들마저 그의 뒤를 따르며 선생의 말씀에 귀를 기울였다 한다. 평생 제도 교육을 받은 적이 없으며 학력이라고 한다면 어릴 적 관선정 서당에서의 6년이 전부였지만 어떤 질문에도 막힘이 없던, 그 짐작할 수 없는 학문적 깊이 앞에서 사람들은 겸손해지곤 했다고 한다.

학문에 대한 청명의 조예와 열정은 그가 이 세상을 떠나기 얼마 전 우리 손에 쥐여진 책, 『당시정해(唐詩 精 解)』에서도 잘 드러난다. 1956년 초판 『당시정해』를 다시 수정해 40여 년 만에 낸 것이다. 초판부터 왠만한 백과 사전의 ‘당시’ 항목에는 참고 문헌으로 되어 있을 정도로 당시 선집에 있어서는 하나의 레퍼런스 북으로 일컬어지고 있었다. 그런데 이것조차도 ‘불미스러운 곳이 많아 항상 께름칙해 언젠가 다시 쓰려던’ 결심을 옮겨 10년 작업 끝에 다시 펴낸 것이다. 개정판이지만 한자를 잘 모르는 요즘 세대들을 위해 거의 다시 쓰다시피 한 책이나 다름없다. 젊은 층에게 좀더 많이 읽히기 위해 “책은 작게, 값도 싸게 만들라”고 출판사 편집진들을 다그치기도 했다는 선생은 해설에 연연하지 말고 마음에 드는 시를 골라 열 번 백 번 입으로 외다 보면 그 시의 의미를 깨달을 수 있다며 당시 감상법을 추천하셨다. 이 외에도 선생은 『한국의 서예』 『한국미술전집(일본어판)』 『한국금석집성』 『단권신역(單券新譯)』 『옥루몽』 등의 활발한 저술 활동을 하신 바, 이처럼 한학과 관련된 많은 연구로 인해 1979년에 보관문화훈장을 받으시기도 했다.

청명(靑溟)은 순수한 소년이자 엄격한 스승이셨다 “그분처럼 재미있는 노인도 없을 겁니다” 80이 넘은 연세에도 젊은이들과 거침없이 대화를 하던 스승을 회고하면서 한 제자는 소리 없이 깊게 웃는다. 지곡 서당은 일 년에 두 번 가족들이 모이는 날이 있다. 그 중 하루가 임창순 선생의 생신날이다. 130여 명의 지곡 서당 졸업생과 재학생들, 그리고 그들의 자식과 아내가 이 지둔리 골짜기를 메운다. 그런 날은 음식을 만들어 밤을 세워 가며 시간을 함께 보낸다. 조용하던 서당이 그 날 하루는 강(講) 대신 큰 웃음소리로 채워진다(올해는 선생이 돌아가셔서 추모 사업에 대한 논의들을 했다고 한다). 젊은 제자들과 마주 앉아 밤을 새워 이야기를 나누고 제자들이 부르는 노래를 따라 부르시던 선생은 형식과 격식을 무척이나 싫어하셨다. 설날 제자들이 세배를 하러 오면 평등한 사람끼리 무슨 절이냐며 한사코 거절하셨다. 현재의 불평등한 남녀 관계는 빨리 개선돼야 할 근본적인 문제라고 생각하셨고 자식들에게는 자신이 죽고 나면 화장을 하고 제사도 폐하라고 하셨다.

혹 타고 다니는 차가 없을 때는 제자들이 태워 드린다고 해도 각자 할 일이 있을 텐데 가까운 사람에게라도 신세져서야 되겠냐며 어느 새 버스를 타고 나가 버리셨다. 검은 머리의 제자들과 마주 앉아, 왼손에는 담배를 오른손에는 검은 바둑알을 잡고 내기 바둑을 두며 바둑판을 여유 있게 내려다보시는 백발의 스승을 회고하는 또 다른 제자는, 스승의 죽음을 아직 잘 실감하지 못하고 있었다. 잘 두시진 못하셨지만 한 번 시작하면 내리 일곱 판을 둘 정도로 바둑을 즐기시던 선생은, 중국 여행을 갈 때도 바둑판만은 챙기셨다고 한다. 지곡 서당의 앨범을 한 장 한 장 넘기면 그 속에는 항상 제자들과 웃고 계신 선생이 있었다. 하지만 수업 시간에만은 엄격하셨다. 특히 강(講)을 볼 때면 평소와 다른 엄격함에 다들 바짝 긴장했다 한다. 그러면서도 선생은 수업을 지루하지 않게 이끌어 가셨다. 학문과 삶의 진정성에서 자연스럽게 우러나오는 위트, 가끔씩은 어린아이처럼 떼를 쓰던 모습. 학문적으로는 존경하지만 동시에 인간적 친근함을 느낄 수 있는 스승은 많지 않은 현실에서, 정작 보여 주지 않아도 자연스레 드러나는 그 어떤 풍모. 선생의 권위는 바로 그런 것이었다.

학자로서의 사명에 마지막까지 충실했던 삶 선생께선 작년 6월에 소장하고 있던 고서화와 자택, 토지 등의 사재를 털어 고전종합연구소인 청명문화재단을 설립하셨다. 살아 생전에 한학 공부를 위한 서당을 세워 가르침을 주었고 이제 안정적으로 연구할 수 있는 터전까지도 만들어 놓으셨으니, 학자로서 그리고 스승으로서 선생은 할 일을 다 하고 가신 것이다.

통일 문제를 위한 국민적 논의를 확산시키고자 1998년에 창간한 계간지 『통일시론』의 작업도, 올해 초 돌아가시기 직전까지 선생은 봄호 원고를 꼼꼼히 검토하셨다. “지금은 책을 읽는 사람, 지식인이 아주 살기 어려운 시대입니다. 교사나 교수들을 특수한 사람으로 생각하고 학생들을 지도하는 신성한 직업을 가졌다 해서, 선생이면 무조건 행정부의 지시에 순종해야만 그 자리를 지킬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됐어요. 봉건 시대에도 임금의 명령에 항거하거나 상관의 지시를 따르지 않은 사실이 얼마든지 있지 않습니까. 지식인들이 일신의 안전만을 생각하고 사회 현실에 대해 비판할 줄 모르고 잘못된 것을 바로잡는 운동에 나서지 않는다면 이는 자기의 사명을 저 버리는 것이죠. 학생들에게도 그런 정신이 있어야 합니다. 사회가 바로잡히고 또 우리가 살 수 있는 권리를 가지고 있어야 그것이 삶인데 그 권리 다 상실하고서는 살 수 없는 것 아닙니까? 우선 자기 생존을 위해서라도 할 수 있는 데까지 해야 하죠.” (『역사 비평』 1992년 가을호에서)

1999년 4월 12일 오전 8시 30분. 청명 선생은 아무 말도 남기지 않고 조용히 삶을 마감하셨다. 평소 뜻대로 시신은 화장되어 지곡서당과 모친의 묘소가 있는 남양주 일대에 뿌려졌다. 말만 많은 세상이다. 깊이 얕은 열정만이 난무하는 세상이다. 가슴 깊은 곳에 자리잡고 있던 ‘실천적 진리애’ ‘소탈하면서도 운치를 아는 삶’. 이 한 노학자의 생을 더듬으며 우리는 그저 머릿속 단어로만 존재하던 스승, 학자, 그리고 지식인이라는, 그 정확한 뜻이 무엇인지 정말 이해하기 어려웠던 단어들을 가슴으로 배웠다. 가슴으로 울려 퍼져 오는 선생의 삶 처음 경기도 남양주 마석리라는 곳에서 시외 버스를 내렸을 때, 우리는 그 곳에서 푸른 나무들에 둘러쌓여 있는 지곡 서당을 보았었다. 그 곳에는 그저 조용한 물소리와 바람소리, 그리고 가끔 울어 대는 매미 소리만이 있었다. 하지만 돌아오는 길에 우리의 귓가에는 하나의 소리가 더불어 따라오고 있었다.

강(講)! 누구의 것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 누군가의 강(講)하는 소리가, 마치 청명의 숨결처럼, 그제서야 들려 왔던 것이다. “…내가 집을 하나 이루고자 한 바 이미 오래였는데 마침내 그 때가 되어 지금 마룻대(上樑)를 올리는도다. 내가 이 집을 지음은 재물로 삼아 뒤에 자식에게 물리려 함이 아니니…다만 바라는 바는 이 집에서 영원하도록 글 읽는 소리 그침이 없었으면 하는 것일 따름이로라…” (청명[靑溟] 선생의 『지곡 서당 상량문[上樑文]』에서)

[성균관대학보의 기사 내용]

[2001년 11월 4일 정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