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우(李相禹) 한림대 총장

 

 

 

 

중국상해 방문시 외쪽부터 윤대원 일송학원 이사장, 이상우 한림대 총장, 그리고 필자 (2004년 5월 19일)

한림대 이상우 총장을 처음 뵙고 친분을 가지게 된 것은 3년전 한림대 대표단과 함께 중국 생하이를 방문하고 일주일간 여행했던 기간이었다. 당시 방문 목적은 중국의 급속한 국가발전상을 현지에서 직접 확인하고, 특히 중국의 경제성장에 있어서 산학협동과 대학개혁의 성공적 사례를 현지에서 연구함으로서 한림대학교의 발전전략을 수립하는데 참조함이었다.

그 후 이상우 총장에게도 한림대의료원 뉴스레터를 매달 2차례씩 보내주었는데, 이들 내용에 대해서 윤대원 이사장과 자주 언급하고 토론을 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아래 글들은 2002년 동아일보와 2000년 월간조선에 소개되어던 내용들인데 이상우 총장의 사상을 가장 심도있게 접할 수 있었던 내용이다.  [2007.2]


 "소신파 보수주의 논객" 이상우 교수

연세대 사회학과 김호기(金皓起) 교수는 얼마 전 출간한 그의 책 ‘말, 권력, 지식인’에서 아카데미즘의 격을 갖춘 한국의 대표적인 소신파 보수주의 논객으로 송복(宋復) 연세대 교수와 함께 이상우(李相禹·64) 서강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를 꼽았다.

올 2월 퇴임한 송 교수에 이어 내년 2월에는 이 교수가 퇴임한다. 본래 정년은 내년 8월이지만 한림대 총장으로 선임돼 이번 학기까지만 강의를 한다. 9일 오전 10시 서강대 다산관에서 퇴임기념 강연을 하는 이 교수를 그가 회장으로 있는 서울 논현동 신아세아질서연구회 연구실에서 만났다.

-어린 시절 경험이 정치학자로서의 사상 형성에 어떤 영향을 미쳤나

“태어난 후 북한 함흥에서 살았다. 일제강점기말에 국민학교에 들어갔다(이 교수는 38년생이다). 일본말은 배운 적도 없는데 조선말 쓴다고 벌을 받았다. 불합리했다. 무섭다는 생각이 들었다. 소련군이 들어왔다. 그 무섭던 일본군이 하루아침에 소련군에 꼼짝못했다. 그땐 정치라는 말은 몰랐지만 뭔가 있다고 생각했다. 완장을 찬 사람들을 피해 46년 월남했다. 국민학교 6학년 때 전쟁이 터지고 인민군 치하의 서울에서 3개월을 보냈다. 그때 포탄이 떨어지는 것보다 더 무서운 건 무질서라는 것을 알았다.”

-4·19세대 학자로서는 보수적이 아닌가.

“57년에 서울대 법대에 들어갔다. 그때는 누구나 ‘우리나라는 왜 이 꼴로 사는가’ 회의했다. 나는 4·19 당시 국회의사당 앞 서울대생들의 집회에서 사회를 봤다. 4·19에 적극 참여한 사람들의 화두는 ‘우리도 한번 잘 살아보자’는 것이다. 4·19는 세간에 잘못 알려져 있다. 솔직히 말해서 4·19세대는 민주주의에 대한 투철한 생각이 없었다. ‘잘 살아  보자’는 생각으로 터키의 케말 파샤와 같은 선의의 독재, 강력한 리더십을 요구했다는 점에서 5·16을 일으킨 청년 장교들의 생각과 같았다. 그런 의미에서 4·19와 5·16은 같은 맥락이고 4·19세대가 5·16에 협조한 것은 변신이 아니다(이 교수는 70년대 유신체제에 대해서는 비판적이지만 5·16과 60년대 박정희 정권을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70∼80년대 학생들과의 관계는 어떠했나.

“경희대에서 74년 국내 처음으로 ‘북한정치론’이란 제목으로 강의를 시작했다. 강의자료로 북한헌법을 나눠주다가 안기부에 끌려가기도 했다. 그러나 내 입장은 공산주의처럼 개인을 억압하는 전체주의는 안 된다는것이었다. 서강대로 자리를 옮겨서는 첫 시간에 ‘나는 왜 반공인가’라고 칠판에 쓰고 학생들과 논쟁을 시작했다. 80년이 분수령인 것 같다. 학생회라는 것이 조직되고 그들은 논쟁 대신 대자보를 택했다. 그때 대자보에는 내가 ‘구제불능 보수반동의 괴수’라고 표현되기도 했었다.”

-올바른 통일은 무엇인가.

“지금 힘을 얻고 있는 통일론은 민족주의적 센티멘털리즘에 입각한 것이다. 민족통일을 하면 됐지 그 체제가 자유민주주의면 어떻고 아니면 어떠냐는 것이다. 그러나 자유민주주의는 89년 소련 붕괴 이후 세계의 보편적인 이데올로기로 자리잡았다. 내 입장은 통일은 미루더라도 자유민주주의를 희생할 수 없다는 것이다. 지금은 일시적으로 민족우선론이 힘을 얻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역사의 흐름은 그렇지 않다. 장기적으로 제대로돌아올 것이라 믿고 있다."    

-그런 입장이 요즘 불편하지 않은가?

“아차 하면 왼쪽으로 혹은 오른쪽으로 빠질 수 있는 좁은 논두렁을 30 년 가까이 걸어왔다. 내가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한다. 솔직히 신문에 글쓰고 싶지 않다. 가까운 사람도 말린다. 그러나 아무도 나서지 않으니 나라도 해야 하지 않는가. 정작 나보다는 내 밑에서 공부하는 학생들이 더 힘들어한다.”

-강준만씨가 월간 ‘인물과 사상’ 등에서 당신을 비판한 글을 읽어본 적이 있나.

“읽어보지 않았다. 전에 강씨가 ‘김대중 죽이기’란 책에서 날 비판한 부분을, 아는 사람이 줄을 그어 들고 왔다. 이상우란 이름이 많다보니 나와 또 다른 이상우를 착각하고 잘못 인용한 부분도 있었다. 그 후론 읽지 않았다."

    ▼이상우교수는…▼

경북 상주시에서 태어났으나 북한 함흥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서울고 졸업 후 57년 서울대 법대에 수석 입학했다. 대학 4학년 때인 60년 한국일보에 입사한 후 이듬해 공군장교 입대와 동시에 조선일보 편집부로 자리를 옮겨 67년까지 근무했다. 이해 미 국무부 장학금으로 하와이대로 유학, 정치학을 공부했다. 73년 귀국 후 경희대에서, 76년부터는 서강대에서 강의했다. 올 10월 한림대 총장으로 선임됐다. 주요 저서로는 ‘북한정치입문’(2000) ‘국제관계이론’(1999) ‘새 국제질서와 통일환경’(1995) 등이 있다.

[2002.12.3. 동아일보 송평인기자]

 

[인물연구] 북한 분석의 大家 서강대 李相禹 교수

『북한은 가장 알기 쉬운 체제. 바둑을 定石대로 두니까』

 

  성실한 秀才

지난 6월30일 오전 9시30분, 서강대학교 다산관 6층의 교수실을 찾았을 때 李相禹(이상우·62) 교수는 이미 책상 앞에서 몇 장째인지 모를 글을 쓰고 있었다. 儒敎的(유교적) 가풍 속에서 성장했던 李相禹 교수의 덕목 중에는 「誠實(성실)」이 으뜸을 차지한다. 그래서인지 초등학교 시절부터 익힌 일찍 등교하는 습관은 교수가 된 뒤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車가 흔치 않았던 1970년대에는 숙직하던 학교 정문 수위들이 李교수의 출근 때 비로소 교문을 열 정도였다. 교단에 선 지 27년째인 지금까지 李相禹 교수의 이름은 정부의 改閣說(개각설) 때마다 언론을 통해 자주 오르내렸지만 한 번도 장관으로 등용되지 않았다. 국방·외교·안보·통일분야의 자문위원으로 물경 20년 넘게 활동해 왔다.

1938년 4월16일 부친의 직장이 있던 경상북도 상주에서 태어나 어린시절을 고향인 함경남도 함흥에서 보낸 李相禹 교수는 서울 중·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61년 서울大 법대 행정학과, 1966년 同대학원 법학과 졸업, 1971년 美 하와이 대학교 대학원에서 정치학 석사 및 박사학위를 받고 2년간 하와이 대학 부설 국가차원연구소 부소장을 지낸 뒤 귀국했다. 1973년부터 3년 반 동안 경희대학교 정치학 부교수를 지내다 1976년부터 서강대학교 정치학 교수로 옮겨 현재까지 근무중이다. 1960년 한국일보 사회부 기자로 입사, 1961년부터 1964년까지 공군 장교 복무, 1964년부터 1967년까지 조선일보 편집부 기자로 근무한 기록도 이력서에 포함된다.
 
그는 초중고등학교 12년간 단 한번도 首席을 놓친 적이 없는 기록을 갖고 있다. 작고한 金元圭(김원규) 당시 서울 고등학교 교장은 생전에 어느 방송사와의 인터뷰에서 평생 기억에 남는 학생으로 李相禹 교수를 꼽았을 정도이다. 서울대 법대 입학과 졸업 역시 수석이었다(李교수의 자녀 3녀1남 모두가 고등학교 때까지 줄곧 전교 수석에 전원 서울대학교 출신이다). 부인 黃永玉(황영옥·61·能仁종합사회복지관 관장)씨도 서울대 법대 출신임을 감안하면 가족 모두가 서울대 출신인 점도 예사스럽지 않다.
 
李相禹 교수의 首席 기록들은 이미 그의 세 형(相稷 작고, 相卨, 相舜)들에 의해서도 수립된 바 있다. 이상직은 서울공대 수석입학, 이상설은 서울의대 수석입학, 이상순은 MIT공대 수석입학 등. 李相禹 교수는 태권도, 수영, 암벽등반, 그림과 음악에도 소질이 있다. 대학을 졸업할 무렵, 李교수가 구사할 수 있는 외국어는 영어와 일어, 중국어 및 독일어 등이다. 多國語(다국어)를 구사하는 만큼 국어 문장은 漢字(한자)를 적절히 사용하여 극히 간결한 문체를 고수한다. 數學的 사고, 法學的 논리가 어우러져 있는 李교수의 글은 그래서 대단히 정형적인 특징을 갖고 있고 칼럼이나 논문은 빈틈없는 수학공식 같다는 느낌을 받는다. 스스로도 『논문은 미분 방정식이다』라는 말을 할 정도이다.
 
李相禹 교수의 首席 기록들은 이미 그의 세 형(相稷 작고, 相卨, 相舜)들에 의해서도 수립된 바 있다. 이상직은 서울공대 수석입학, 이상설은 서울의대 수석입학, 이상순은 MIT공대 수석입학 등. 李相禹 교수는 태권도, 수영, 암벽등반, 그림과 음악에도 소질이 있다. 대학을 졸업할 무렵, 李교수가 구사할 수 있는 외국어는 영어와 일어, 중국어 및 독일어 등이다. 多國語(다국어)를 구사하는 만큼 국어 문장은 漢字(한자)를 적절히 사용하여 극히 간결한 문체를 고수한다. 數學的 사고, 法學的 논리가 어우러져 있는 李교수의 글은 그래서 대단히 정형적인 특징을 갖고 있고 칼럼이나 논문은 빈틈없는 수학공식 같다는 느낌을 받는다. 스스로도 『논문은 미분 방정식이다』라는 말을 할 정도이다.

李교수의 중국어 실력은 隱語(은어)나 유머를 구사할 만큼 능숙하다. 비결 중엔 어린 시절 함경북도 두만강변에서 몇 년을 지낸 경험이 주효했다고 한다. 『눈이 오면 얼어붙은 두만강은 눈에 덮여 없어지죠. 또래들과 뛰어놀다 보면 어느새 중국 땅이기도 했다가 조선 땅이기도 했죠. 경계선도 없었고 벌판이 그대로 연결된 것뿐이니까요. 그때 살던 회령은 多민족 도시였습니다』

 
  기자 시절의 失手談
 
이밖에도 술에 얽힌 이야기를 밤새워 할 수 있다. 酒量(주량)은 李교수와 함께 마시다가 끝장을 본 사람이 없다고 할 정도지만 항상 선을 넘지 않는 것도 李교수의 특징이다. 담배도 반갑 이상을 피우지만 건강은 이상 없는 강한 체질이다. 李相禹 교수는 서울대학교 학부를 졸업하기 전 한국일보 기자 시험에 합격하여 1960년부터 사회부 기자생활을 시작했다. 졸업 후 공군 장교시험에 합격, 정훈장교로 복무하면서 대학원 진학을 염두에 두고 朝刊이던 朝鮮日報社로 옮겨 1964년부터 晝耕夜讀(주경야독)을 계속했다.
 
강의시간에 가끔 기자시절의 이야기를 학생들에게 들려줄 때가 있다. 李교수는 「글을 얼마나 정확히 써야 하는지」를 설명하면서 자신의 경험담을 털어놓는데, 그 내용은 무용담이 아닌 실수담이다. 『약국에서 잘못 조제한 감기약을 먹고 사람이 죽었어요. 이 기사를 받아 보도했는데 다음날 보니 약국 이름이 잘못 기사화되었습니다. 엉뚱한 약국이 피해를 본 겁니다. 그 약국은 망했어요. 얼마나 미안합니까. 그만큼 글이 무섭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1967년 美 하와이 대학으로 유학을 갔을 때 李相禹 교수는 자신보다 겨우 네 살 많은 유태계 교수를 스승으로 삼아야 했고 지금도 그를 평생의 은사로 모신다. 루돌프 조셉 럼멜 교수는 국제 정치학 분야에 자연과학을 도입하여 「計量(계량) 정치학」 분야를 개척한 인물로 한국전쟁과도 깊은 인연을 갖고 있다.
 
 
  李相禹의 6·25와 공산주의 연구
 
李相禹 교수가 독자적인 북한이론을 구성하고 평생을 연구하게 된 것도 따지고 보면 6·25와 무관하지 않다. 함경남도 함흥에서 儒學者 집안을 형성했던 李교수의 가정은 1945년 해방이 되면서 어려워지기 시작했다. 식산은행(산업은행의 전신)에 다니던 부친 李綺洙(이기수)씨는 양복 호주머니에 손수건 한 장만 넣어 다니는 것을 원칙으로 삼았던 청렴결백형의 인물이었지만, 소련 점령군 체제에서는 버틸 수가 없었다고 한다.
 
1946년, 인민학교 1학년이었던 소년 李相禹는 가족을 따라 걸어서 서울로 월남했다. 서울 동숭동에서 짐을 풀었던 그해, 7월19일 소년 李相禹는 어머니(任貴淳·작고)의 심부름으로 두부를 사러 나가다가 夢陽(몽양) 呂運亨(여운형)의 암살 사건을 지척에서 목격한다. 해방 정국의 혼란과 소용돌이를 체험했던 소년 李相禹는 1950년 6·25가 터지자 敵 치하 서울에서 3개월을 보내야 했다.
 
  『아버지께선 방송을 믿으셨고, 급히 피난 갈 일이 있다면 은행에서 연락을 해주기로 했거든요. 그런데 사태가 급박하게 돌아가자 트럭을 빌려 피난길에 올랐지만 이미 다리는 끊어져 있었습니다. 집으로 돌아와 다락방에 숨어 석 달을 보냈어요』 이 시절의 체험을 李相禹 교수는 그의 책 「북한 정치 입문」 개정판 서문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그해 6월28일부터 9월28일까지 서울에서 보낸 석 달은 내게 처음으로 「세상이 무섭다」는 것을 뼈저리게 가르쳤다. 무질서의 무서움이 전쟁의 포화보다 더 무섭다는 것도 알게 되었고 또한 광신적 정치체제 밑에서 겪는 불안, 공포와 절망감, 무력감이 어떤 것인지도 철저하게 배웠다. 戰線이 있는 전쟁에서는 포화를 피하면 살아날 수 있으나 억압적 지배체제는 피할 수 없는 절망적 공포 속에서 삶과 죽음을 숙명에 맡기고 나날을 보내야 한다는 것도 체험했으며, 희망이 있는 고통은 인간이 잘 견뎌낼 수 있으나 절망 앞에서 인간은 정신적으로 죽는다는 것도 깨달았다>
 
서울에서 숨어 지내던 당시 서울대 공대 재학중이던 큰 형님 李相稷(이상직)이 포탄의 파편에 맞아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수복 직전, 유엔군이 사격한 포탄이었다.『참으로 훌륭한 형님이 돌아가셨지만, 형님은 그 자리에만 없었다면 살 수 있는 확률이 더 컸지요. 하지만 억압적인 체제는 피할 곳이 없어요. 어떻게 해볼 재간이 없어요. 한 치 앞도 못 내다보고 오직 배급 주는 사람만 쳐다봐야 하는 시스템이라고요. 이 체제에서 겪는 절망과 공포와 불안은 겪어 보지 않은 사람은 상상을 못합니다. 3개월을 겪은 내가 그렇게 고생했는데 以北에 있는 2500만 동포는 어떻겠습니까. 모두가 우리 동포인데 가슴 아프지 않을 수 없지요』
 
소년 李相禹의 체험이 共産圈(공산권) 연구로 이어지는 계기를 마련해 준 사람은 梁好民(양호민·81) 현 한림대 명예교수였다. 『전쟁 직후 공산주의의 「共」자만 나와도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키기 때문에 아무도 연구할 엄두를 못 냈어요. 그러나 공산주의와 싸우는 마당에 공산주의 공부를 안하면 어떡하겠어요. 그때 제일 용감하게 책을 낸 분이 梁好民 선생이지요. 내가 고등학교 때이니까 1950년대 후반인 1957년쯤일 겁니다. 「공산주의 이론과 비판」이 그 책이었지요. 우리나라에서 공산주의에 대해 최초로 공부한 사람들은 전부 그 책으로 했어요. 여기에 도움을 많이 준 분이 金俊燁(김준엽) 선생입니다』
 
한국 광복군 출신의 金俊燁(80) 前 고려대 총장은 해방 전 일본 慶應義塾(경응의숙·게이오대학)을 중퇴하고 중국 동방어문 전문학교에서 전임강사를 하다 1956년부터 고려대학교에서 문과대 부교수로 재직하고 있었다. 한국에서 공산주의 연구의 태동은 梁好民·金俊燁, 이 두 사람에서부터 비롯되었다. 梁好民·金俊燁 두 스승은 이 무렵 등장하는 극소수의 후학들을 물심양면으로 지원하면서 한국 공산주의 연구가들로 키워내기 시작했다. 李相禹 교수는 2세대에 속할 것이다.
 
『그 시절 師弟之間(사제지간)엔 오늘날처럼 삭막하지 않은 끈끈함이 있었지요. 私益을 넘어 국가와 민족을 위한다는 공동체 의식도 있었고…. 지식전달자가 아닌 그야말로 인생의 스승이 많았던 시대입니다. 金俊燁 선생은 수시로 절 불러내시곤 특별히 하실 말씀도 없으면서 그저 격려해 주시는 겁니다. 큰 은혜를 입었지요』
 
두 師父(사부)로부터 이론적 접근을 시작한 李相禹 교수는 金俊燁 선생의 족적을 따라 공부하기로 하고 하와이 대학으로 유학갈 때엔 중국학을 연구 대상으로 삼는다. 그런데 왜 李相禹 교수는 중국을 연구한 것일까. 『당시 우리나라에서는 북한을 공부할 수가 없었어요. 잘못하면 보안법 위반이 되니까요. 북한을 공부하기 위해서 중국을 연구한 겁니다. 중국을 공부해서 연장시키면 그대로 북한에 닿거든요』
 
 
  名講義
 
유학시절 럼멜 교수는 자신이 개설하고 所長으로 있던 하와이大 부설 國家次元연구소에 정치학 박사과정을 마친 李相禹 박사를 부소장으로 임명하고 함께 2년 동안 연구했다. 1973년 국내로 돌아온 李相禹 박사는 경희대학교 정치학 副교수로 3년 반 동안 재직한 뒤 서강대학교 정치학 교수로 옮겼다. 다방면에서 소질을 갖고 있던 李교수는 강의를 통해 창조적인 적용을 하곤 한다.
 
  주로 국제정치학, 북한 정치학 등 안보분야와 직결되는 학문을 강의하지만 안보야 말로 자연과학의 결집체라는 의미에서 자연과학적인 설명을 풍부하게 곁들인다. 특히 국제정치학 분야의 과목인 「전쟁과 평화」는 톨스토이 작품을 연상시켜 문학강의인 줄 알고 들어갔다가 너무나 흥미있어 전공을 바꾼 학생도 있을 정도이다. 예를 들면 「국가의 과학 기술 수준이 전쟁의 성패를 결정한다」는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李相禹 교수는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지구에서 가장 먼 행성은 명왕성이죠. 太陽은 地球의 130만 배 크기로 지구로부터 1억5000만km의 거리에 떨어져 있는 겁니다. 직경 30cm 되는 수박을 태양으로 치면 수박으로부터 12m 떨어진 곳에 놓인 작은 콩 하나가 地球죠. 이 콩으로부터 2.5cm 떨어진 곳의 후추씨가 달이 됩니다. 수박에서 400m 밖에 있는 깨알이 명왕성이에요. 알죠? 다 고등학교 때 배웠잖아요(여기서 학생들은 할 말을 잃는다. 그런데 李교수는 한 걸음 더 나간다). 이 수박에서 8000km 밖에 있는 별이 알파 센타우리라는 항성입니다. 4광년 거리죠. 현재는 인간들이 명왕성까지 가서 사진을 찍어 電波로 보내오지만 이 電波로도 물 속은 들여다볼 수가 없어요.
 
  물 속엔 잠수함이 있죠. 독일은 300~ 500t급 디젤 잠수함인 U보트를 최초로 만들어 2차대전 당시에 대서양의 화물선이란 화물선은 다 깼어요. 하지만 전파로는 찾아낼 수가 없으니 레이더도 무용지물이잖아요. 미국은 그래서 全세계 바다에 센서를 부착했어요. 이 센서에 포착된 신호는 즉시 인공위성으로 전달되어 펜타곤에서 감지할 수 있습니다. 이제는 과학적인 능력이 없으면 전쟁 수행을 못하는 겁니다>
 
  냉전의 배경이 되는 하드웨어를 설명하는 대목에서는 재미있는 수치를 인용한다. <국가간의 전쟁에서 어느 한쪽 인구의 40%, 산업시설의 60%가 깨지면 보복능력을 상실한 채 국가는 치명상을 입습니다. 그러니까 일본과 중국이 전쟁을 한다면 땅이 좁은 일본은 1메가t급 핵폭탄 두 발이면 끝이 나지만 중국엔 2000발을 쏴야 한다는 계산이 나오죠. 한국은 인구의 3분의 1이 서울에 몰려 살고 京仁공업지구만 때려도 다 날아가버리는 셈입니다. 필요한 핵폭탄의 수는?>
 
  교과서의 목차에 따라 진행되는 李교수의 강의는 교과서에 실린 원리에 대한 설명을 위해 현실문제, 시사문제를 주된 소재로 강의한다. 그래서 그의 강의는 매번 들어도 재미있고 학부생들에게는 「서강대학교 3대 名講義」 중 하나로 꼽히기도 했다. 강의를 듣는 재미는 그러나 공짜가 아니다. 중간고사에 임박해서야 학생들은 비로소 교과서를 通讀(통독)하지 않고서는 결코 좋은 점수를 받지 못한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된다. 李교수는 중간고사의 경우 교과서 내용 중 일부를 문제로 발췌하여 괄호 넣기 식으로 출제한다. 이 시험의 무서운 점은 교과서를 달달 외우지 않고서는 결코 A학점을 받을 수 없다는 데 있다.
 
  암기력을 강요하는 이유에 대해 李교수는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사회과학을 제대로 하려면 식별 능력이 갖춰져야 합니다. 식별 능력은 분석력과 친숙도가 균형 있게 안배될 때 제일 좋지요. 분석 능력은 책보다는 직접 설명이 효과적입니다. 분석력은 내 강의 시간을 통해 얻어가고, 친숙도는 스스로 책을 통해 암기해서 가져가야 합니다. 전부 외우라는 것이 아니라 어디에 무엇이 있다는 정도만 알면 훗날 찾아볼 수 있거든요』
 
 
  평화와 갈등 그리고 미래
 
李相禹 교수가 북한 정치론을 학과목으로 개설한 것은 1974년부터. 대한민국 최초의 학과목 개설이었다.
『생각도 못할 때였지요. 하지만 북한을 모르고 어떻게 북한을 상대하느냐 말입니다. 人材도 가르쳐서 키워야 국가가 쓸 수 있는 것 아닙니까. 가르치는 것은 학자의 임무이니 반드시 해야 한다는 신념이 있었어요. 하지만 내가 특별해서가 아니라 운이 좋아서 가능했다고 봅니다. 이것 때문에 여러 번 불려가기도 했고 말썽도 많았지만 그때마다 나로서는 큰 고생을 하지 않았어요』
 
「큰 고생 안했다」는 뜻은 당시 정보부와 검찰을 포함해 각계에 진출했던 서울대 법대 후배들의 도움이 있었다는 뜻이다. 그중 한 사건은 학생들에게 강의를 위해 복사해 돌린 북한 헌법 조문 때문에 빚어졌다.
 
筆禍(필화)도 있었다. 1975년 「문학과 지성사」에서 남북관계를 주제로 李교수에게 청탁을 해와 써 준 원고가 말썽을 일으켰다. 李교수가 기억하는 글의 줄거리는 이렇다. 「우리 정부가 對北 전략에서 근본적으로 自害(자해) 행위를 하고 있다. 왜냐하면 북한이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한다면 이를 막을 수 있는 우리의 방안은 교육받은 중산층을 두텁게 하는 길뿐이다. 그런데 정부가 나서서 維新(유신)이란 것을 해놓고 중산층을 스스로 부수는 작업만 체계적으로 하고 있다. 이것이야말로 利敵(이적)행위이다」 이때에도 李교수는 검찰에 있는 후배들로부터 「경고」만을 받아 잡혀 들어가지 않았다고 한다.
 
북한 서적이 엄격하게 통제되던 이 시절에 李相禹 교수는 金日成 저작선집을 포함, 주체사상 관련 서적 등을 기술 좋게 수입해 연구하기도 했다. 『金日成 선집은 한꺼번에 들여오면 반드시 검색과정에서 걸리니까 외국에서 한 권씩 소포로 보내게 했어요. 다 들어오고 딱 한 권만 검색에 걸렸던 적도 있어요. 이걸 읽어보니 북한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정확히 알게 됐지요』
 
체험에서 시작하여 평생을 주목하고 연구해 온 대상이 북한인 만큼 李相禹 교수는 국제 안보관련 회의 때마다 초청되곤 한다. 수업에 큰 지장이 없는 한 연간 십여 차례씩 국제회의에 참석하는 李교수는 평생에 걸친 학문의 주제를 「갈등과 평화질서」라고 말했다. 올해로 정년 퇴임을 3년 앞둔 李相禹 교수는 「북한 정치 입문 - 金正日 정권의 특성과 작동원리(나남출판)」 개정판을 내 화제가 되었다. 개정판이 화제가 된 경우는 매우 드문 편이다.
 
 
  가장 알기 쉬운 나라 北韓
 
李교수는 개정판을 낸 목적을 『일반인들에게 북한을 제대로 보는 방법을 소개하고 싶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특히 『금년의 6·15 頂上회담에서 많은 사람들이 혼란을 느끼는 상황을 학자의 입장에서 좌시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 했다. 지난 20여 년간 대다수 북한 연구가들은 북한체제와 정권의 「변화」에 초점을 맞춰 연구 결과를 발표하곤 했다. 이들 대부분이 그때마다 학계와 학생들로부터 큰 반향과 인기를 얻곤 했지만, 10년도 채 안되어 그들 자신이 고안한 이론으로는 더 이상 북한의 최근 현상을 설명하지 못한 채 다른 이론을 급조하는 경우도 많았다.
 
현상을 좇다 본질을 놓친 이런 일들은 한국인들에게 戰爭과 對話의 상대로 50년을 지속해 온 북한을 아직도 이해하기 어려운 대상으로 남게 하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 이 점에서 李相禹 교수는 지극히 본질적인 북한 연구를 해온 셈이며 이번 개정판은 평생을 연구한 자신의 이론틀을 그대로 적용시켜 최근 현상까지 첨부하여 설명하고 있다.
 
  기자가 『6·15 頂上회담으로 북한을 보는 시각들이 큰 변동을 일으키고 있다』고 하자 李교수는 이런 말을 했다. 『사람들이 以北을 알기 어려운 나라라고 하는데 천만의 말씀입니다. 세상에서 제일 알기 쉬운 나라가 이북이거든요. 바둑으로 치면 定石에서 한 발도 못 벗어나는 나라이죠. 어떻게 보면 자기가 쳐놓은 그물에 자기가 걸려 있는 거라고. 그러니 북한은 定石만 알면 이해하기 쉬운 나라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북한을 내다볼 수가 없어요』
 
  ―이번 6·15 頂上회담을 어떻게 보십니까.
 
『6·15 頂上회담은 反共立國(반공입국)으로 50년간 지켜온 우리의 6·25 정신을 일시에 묻어 버렸어요. 그네들이 집요하게 해왔던 전략이 놀랄 정도로 성공한 겁니다. 북한을 변화시키겠다던 햇볕정책이 북측 사회가 아니라 남측 사회만 햇볕을 비춘 셈이지요』 27년간 북한 정치학을 강의해 온 李相禹 교수의 북한 定石은 무엇일까. 李교수는 북한은 철저한 一人지배체제의 전체주의 전제정권으로 중산층 이상은 자진 월남하여 정치 空洞化가 이뤄진 다음에 체제가 수립된 정권이란 점을 강조한다.
 
남한의 경우 정상적인 국가로서 각계 각층이 모여 구성된 사회이지만 북한의 경우 프롤레타리아 계급만이 남은 채로 노동자 계급 중심의 공산주의 국가가 소련의 힘을 빌어 건설되어 현재로서는 아래로부터의 개혁이나 반발이 불가능한 상태라는 것이다. 李교수는 이런 점에서 남북 분단은 어느 분단국가와도 다른 성격을 띠고 있다면서 『민족분단뿐 아니라 계층분단적 성격이 강하다』고 강조했다.
 
 
  북한의 定石-통일전선전략
 
계층의 분단 상황하에서 북한이 지난 50년간 「입을 것 안 입고, 먹을 것 안 먹고」 추구해 온 것은 남조선 해방이며 이에 대해 두 가지 방식을 택해 왔다고 한다. 그중 하나는 무력으로 美 제국주의 추종자를 축출하여 남조선 해방을 성취시키자는 군사적 방식이고, 다른 하나는 남조선의 계급 갈등을 유도해 노동자 계급 중심의 사회로 개변시켜 종국에는 북한과 같은 체제의 국가로 만들어 통합하자는 방식이다. 이것이 「북한의 定石 중 定石」이라고 한다.
 
『북한은 지금까지 이 두 방식을 상호보완적으로 적용해 왔어요. 前者의 경우 군사적으로 승리할 것으로 본 6·25가 대표적인 예가 될 겁니다. 後者의 경우 남한사회에 상층 통일전선을 형성하는 것이 목표였어요. 동백림 사건이나 인혁당 사건 등 각종 지하당 공작사건들은 後者의 전술이 우리에게 발각된 경우에 속합니다』
 
통일전선전략은 레닌에 의해 만들어진 전략이다. 북한은 남한 정부와 화해하고 협조해서 남한 사회 내 親北세력들의 활동이 자유롭게 되면 이들이 종국에는 정권을 잡고 북한과 통일을 한다는 시나리오를 갖고 있다. 북한은 휴전선이 아니라 서울을 主戰場(주전장)으로 보고 있다. 李相禹 교수는 이렇게 말했다.   『현재 남한 사회 내 親北세력은 외부로부터의 지원 세력(북한)이 있습니다. 다원주의 사회인 남한에서 기타 정치세력들은 외부로부터 지원을 기대할 수 없는 형편이지요. 북한은 親北세력이 언젠가는 반드시 이기는 게임이라고 자신하고 있는 겁니다』
 
  李相禹 교수는 孫子兵法(손자병법)을 예로 들었다. 남북한 모두가 孫子式 대응을 해왔다는 것이다.
 
  『孫子兵法의 핵심은 「변화의 관리」입니다. 孫子는 「可勝이 在敵이요, 不可勝은 在己」라고 했는데 내가 이기는 것은 敵이 실수해서이고, 내가 이기지 못함은 나의 실수에서 빚어진다는 것인데, 서로가 팽팽하게 대립할 때엔 나를 지키면서 상대방의 변화를 기다리면 이긴다는 주장입니다. 분단 이후 한국은 오랫동안 북한과 대결을 피하기 위해 골몰했습니다. 전쟁만 예방할 수 있으면 북한체제의 변화를 기다려 통일을 성취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1960년 제2공화국 때부터 우리측은 「평화」를 「통일」보다 앞세워 주장하기 시작합니다. 싸우지 말자는 것이 전제가 되었고, 통일은 뒤로 미룬 겁니다.
 
  朴대통령 때에도 우리가 체제를 튼튼히 하면서 기다리면 북한은 언젠가 망해서 민주화가 될 것이라며 기다리는 전술을 택한 겁니다. 남북 회담이 있기는 했지만 결국 평화를 우선했지 통일 쪽으로 기울어지지는 않았던 것이죠. 그동안 우리의 자존심이 상하지만 미국과의 방위조약을 맺고 對북한 공동 억제력을 유지해 왔던 것도 북한의 군사력 사용을 억제하고 無力化시키기 위해서였던 겁니다. 북한이 남쪽에서 지하당 공작을 하는 줄 알기 때문에 反민주주의인 줄 알면서도, 민주주의에 흠집이 나는 걸 알면서도, 적어도 親北 반체제에 관한 한은 과감하게 탄압을 했어요』
 
  그렇다면 6·15 頂上회담 「이벤트」는 우리에게 무엇을 보여주는 것일까. 李교수의 설명에 따라 분석해 보면 그동안 우리가 「敵」이라고 간주했던 대상이 「敵이 아닌」 대상으로 바뀌어진 것이며 「이념적 차이로 통일은 불가능하다」는 기준들이 「통일은 가능하다」는 기준으로 변화된 것이다. 또한 「평화」를 「통일」보다 앞세웠던 보수세력들이 정권을 잡는 데 실패한 반면, 「통일」을 앞세운 이른바 진보세력들이 정권을 잡은 것도 변화에 속할 것이다. 반면 북한은 質的으로 바뀐 것은 없는 셈이다. 물론 작금에 보도되는 노동신문과 對南 방송에서 남한 사회를 비방하는 내용이 사라졌다는 등의 말초적 변화가 본질적인 변화가 아니란 상정하에서이지만. 李교수에게 북한의 최근 변화 조짐에 관해 해석을 요구해 보았다.
 
  『지난 1월에 金正日이 선언했듯이 「이제 고난의 행군은 끝났다. 금년부터는 본격적으로 對南 평화공작을 실시할 때가 됐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이제부터가 통일전선을 강화하는 시기란 의미입니다. 현 정부는 우리나라에서 성장했던 진보세력에 의해 세워진 최초의 정부입니다. 서양 속담에 「햇빛이 비치는 동안에 건초를 말려라(Make hay while the sun shines)」란 말이 있잖습니까. 남측이 햇볕정책을 펴는 동안 얻을 것을 얻어야겠다는 것이 북한 생각이지요. 북한으로서는 적극적으로 나올 수밖에 없죠. 나는 金正日의 이 연설문을 보고 「조만간 일어날 일들」을 예견했어요』
 
  실제로 李교수는 지난 3월 초 어느 모임에서 강연중에 金正日의 북한이 금년도에 NLL(북방한계선) 공식 선언과 頂上회담 및 평화공세를 할 것으로 예측했었다. 이 예측은 일주일도 안 가 사실로 드러나 참석자들이 놀라기도 했다. 『6·15 頂上회담이 진행되는 걸 보면 북한 정권은 정확하게 계획대로, 마치 전차가 전찻길 가는 대로 가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이걸 자꾸 북한의 변화라고 하니 답답해요. 우리나라가 이런 혼란에 빠지는 것은 북한을 너무 모르기 때문이지요』
 
 
  북한이 얻은 성과
 
  ―현재 북한이 원하는 것은 남한의 경제력입니까. 『많은 사람들이 북한이 어렵기 때문에 남쪽으로부터 경제적 지원을 받기 위해 할 수 없이 頂上회담에 응했다고 보고 있어요. 그게 아닙니다. 경제 지원은 부수적인 것이고, 남쪽에서 親北세력이 활동하는 여건을 조성하는 데 일차적인 목적이 있는 겁니다』
 
  ―그런 시각으로 보면 어떤 것들이 드러납니까. 『제도적으로는 국가 보안법을 고치지 않으면 안되는 상황으로 가고 있지 않습니까. 그들은 우리를 유도하기 위해 선택적으로 하나씩 연출할 겁니다. 그들의 목표는 남한에서 북한을 지지할 수 있는 진보세력이 정치활동을 할 수 있는 상황조성입니다.
 
  또 더 이상 북한은 敵이 아니라는 분위기를 우리 사회에 심으려 하고 있습니다. 金正日 국방위원장이 대한민국에서 출마하면 대통령이 될 거란 농담까지 나오지 않았습니까. 북한에 대한 경계심이 완전히 증발되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현충일은 대한민국을 지키다 죽은 사람을 위해 국민들이 다시 한번 국가를 생각해 보는 날임에도 북한 서커스단에게 박수치는 날이 되었지요. 6·25 기념식도 축소되었고, 이로써 反共立國으로 건국한 대한민국이 지난 50년간 지켜온 정신을 북한은 단 3일 동안 일거에 날려버렸습니다. 이것이 북한이 얻은 성과입니다』
 
  ―우리 쪽에서는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별로 많지 않은 것 같은데요. 『맞습니다. 거의 모든 사람들이 우리의 승리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이 거품은 2∼3개월 안으로 사라질 겁니다. 그때 다시 살펴보고 맑은 정신을 가지게 되면 우리가 무엇을 잃었는지 알게 될 겁니다. 정신차릴 때까지 기다려야죠』
 
  『골수 분자들만 남은 평양은 더 개방될 것이다』
 
李교수는 『북한은 1994년 7월 金日成 사망 이후 지난 5년여 동안 거의 완벽하게 체제를 再정비한 채 주한미군 철수를 압박하는 역할을 남한 사회내부에 移植(이식)하는 데 성공했고, 핵문제와 미사일문제를 무기로 삼아 미국과 한국 사이의 틈을 만드는 데 성공한 셈』이라고 말했다.
 
  ―교수님은 1985년 8월 남북 적십자회담 때 평양에 가셨지요. 그때 보신 평양과 최근 金正日 시대의 평양은 어떤 변화가 있다고 보십니까. 『지난 5년간 金正日은 북한 사회를 「구조개혁」했습니다. 불순하다고 판단되는 사람들을 함경북도로, 양강도로 이주시켰어요. 거기서 굶어죽든지 탈출하든지 상관 안하겠다는 겁니다. 대신 평양 거주 250만, 나머지 각 지역에 골수 분자 약 50만 해서 300만명으로 북한 체제를 끌고 갈 자신이 생긴 겁니다. 이들이 단결하니 우리보다 강하게 보일 수밖에요.
 
함경도나 평안북도 쪽으로 접근한 사람들은 북한 주민들이 굶어죽고 있다고 하고, 평양을 다녀온 사람들은 가라오케도 있고 양주도 마셨다며 북한을 좋게 보게 되지요. 서로가 말이 틀리는 것은 한 부분만 보고 왔기 때문입니다. 이번에 남한 사람들에게 보여진 평양 주민들은 북한의 상층부요, 골수 당원들입니다. 이들과 金正日이 일심단결해 있다고 보면 되죠』
 
  ―이들이 단결해서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이 있다고 보십니까. 『평양은 지금보다 더 개방될 겁니다. 개방해도 이들은 북한 체제를 버릴 수 없는 상층부 기득권 세력들이기 때문이죠. 金正日은 이들을 동원해서 할 수 있는 각종 드라마를 세계를 무대로 연출할 겁니다. 金正日의 자신감은 여기서 나오는 겁니다』
 
  ―그렇다면 평양의 개방되는 모습에 대해 북한이 변화했다고 보면 안된다는 말씀입니까. 『우리는 북한의 이런 태도에 대해 자꾸만 북한이 변화하는 중이라고 착각하는 겁니다. 햇볕정책이 승리한 걸로 보는 거죠. 실제는 아닙니다』
 
 
  북한의 駐韓미군에 대한 입장
 
6·15 남북 頂上회담을 남쪽이 실패한 회담으로 보는 李교수는 『북한측은 「표정관리하기 바쁠 정도」로 성공했다고 판단할 것』이라고 말했다. 頂上회담이 열리던 기간 동안 李교수는 중국을 방문하고 있었고 남북합의서가 발표되던 15일 오후 4시30분에는 錢其琛(전기침) 중국 부수상을 만나고 있었다. 『錢其琛 부수상의 응접실에서 기다리는 순간에 남북 頂上회담 합의문이 발표되었어요. 錢其琛 부수상은 이 내용을 다 보고받은 뒤 나를 만났습니다. 그리고는 십여분 동안 남북 頂上회담의 결과에 대해 축하한다며 기뻐했습니다. 중국으로서는 엄청난 성과를 얻었기 때문입니다』
 
  ―중국은 무엇을 기대한 겁니까.  『미군 철수, 그로 인한 극동지역에서의 영향력 확대지요. 그런데 이번 회담에서 북한이 완전히 주도권을 장악했다고 중국은 본 겁니다. 중국은 미국에 직접 압력을 가하지 않고서도 북한을 통해 미군 철수를 실현할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된 것이고. 러시아도 다 쓰러져 가는 북한에 개입할 여력이 없었어요. 그런데 이번 회담에서 북한이 주도권을 쥐게 되니까 접근하기 시작합니다. 일본은 당황하고, 미국은 그들의 원칙을 再점검하기 시작했습니다』
 
  ―미국의 원칙이라면? 『지금까지 韓美 방위조약은 양국간의 국가적 이익이 공통된 상황에서 만들어진 조약이란 점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데 북한이 한반도에서 국제적인 주도권을 장악하기 시작한 것에 미국은 주시하고 있습니다. 미국의 국익적 관점에서는 한국을 버리고 북한을 택할 수도 있다는 계산이 가능한 시점입니다』
 
  ―미국의 태도가 종래와 달라진다는 겁니까. 『미국은 월남전을 두고두고 연구해 왔습니다. 그 결과 당시 미국이 월남이 아닌 胡志明의 월맹 편을 들었어야 한다는 판단에 도달했어요. 무슨 말이냐 하면, 두 분쟁 당사국 중 강한 편에 지원을 해야 훗날 승산이 있다는 겁니다. 이념 문제는 미국의 국익에 우선하지 않는 것이니까요. 이 새로운 원칙을 한반도에 적용하려는 태도를 보이고 있습니다』
 
  ―말씀대로라면 북한은 頂上회담의 반대급부로 주한미군 철수를 주장해야 한다는 것으로 들립니다. 하지만 이번 6·15 회담에서는 그럴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던데요? 金大中 대통령이 주한미군 주둔의 필요성을 언급했을 때 金正日은 가타부타 대응을 하지 않았잖습니까. 『그리고 (金正日이) 황원탁 외교안보 수석을 통해 클린턴 美 대통령에게 주한미군에 관한 입장을 전해달라고 했지요?』

  ―맞습니다. 『그 내용은 훗날 밝혀질 겁니다. 현재 매향리, 노근리 등이 이슈가 되고 남한 내에서 미군 철수를 주장하는 단체들이 공개적으로 등장하는데, 북한은 이제 그런 말 안하죠. 남북회담이나 남북관계에서 북한의 초점은 남한이 아닌 미국에 맞춰져 있어요. 우리 언론들이 자꾸 이것을 망각하고 있어 안타까워요』 실제로 이번 남북 頂上회담에서 북한측의 주무관서는 「조평통」이 아닌 「아태평화위원회」였다. 한반도 문제에 대해서 북한은 「조평통」이 주관해 왔고, 미국과 일본은 「아태평화위원회」가 담당해 왔음을 상기해 볼 때 이 지적은 일리가 있다.
 
 
  『미국은 두 개의 한국 정책을 취할 것이다』
 
국내 또는 남북한만을 두고 그간의 각종 협상과 발언들을 해석하다가 李교수의 말처럼 국제화시켜 놓고 보면 우리가 생각했던 것과 상당히 다른 그림이 그려진다. 한반도에서 미국의 입장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 것인가. 李교수의 설명을 들어보자.
 
『우선 한반도에서 미국의 입장을 보기 위해서는 삼각형 구도를 생각해야 됩니다. 북한이 頂点에 있고 밑변의 두 꼭지점이 한국과 미국입니다. 한국과 미국이 힘을 합쳐 북한을 견제하는 구조입니다. 이 삼각 구도로 지난 50년 동안 한반도에서 전쟁을 억제해 왔던 것이죠. 이번 합의문 제1조에 등장하는 「자주」라는 조항에 미국은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어요. 북한은 그들 스스로 「자주국가」라고 하니 이 용어는 남한에만 적용되는 겁니다.
 
북한은 민족주의를 내세워 남북한간에 손을 잡고 미국을 상대로 공동투쟁을 펴자는 요구를 지난 50년간 해왔지요. 이번 「평양 합의문」은 남한이 이 「자주」에 합의한 것이고, 사전에 미국의 양해를 구하지 않은 것이어서 미국은 당황했어요. 졸지에 남한과 북한이 삼각형 밑변의 두 꼭지점에 가 있고 미국이 頂点으로 위치변동된 형국이죠. 앞으로 미국은 어쩔 수 없이 두 개의 한국 정책(Two Korea policy)을 취하게 될 가능성이 큽니다. 미국은 남북한 사이에서 주도권을 쥔 북한을 더 이상 멀리할 수 없게 되니까요』
 
  ―이번 頂上회담에서 미국은 상당히 충격을 받은 모양이군요. 『이렇게까지 나갈 줄은 몰랐다는 반응입니다. 부시 후보 진영의 리처드 아미티지(前 안보담당 국방차관보)는 내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韓美 관계에서 1894년부터 1945년까지 제1局面에서는 우리 미국이 잘못했다. 우리의 아시아 정책이 일본에 집중되었기 때문이다. 제2局面인 1945년부터 2000년 4월까지는 가장 협조가 잘 된 시기였다. 이제 2000년 4월부터는 제3 局面으로 들어간다」고 말입니다. 미국은 이번 남북 頂上회담을 계기로 남북한이 중심이 되어 미국을 대상으로 하는 구도로 들어서는 단초로 봅니다』
 
  ―미국이 금년 大選에서 공화당 정권을 내세운다면…? 『공화당이 되면 미군 철수를 미국 쪽에서 먼저 들고 나올 가능성이 큽니다. 한반도에서 벌어지는 이런 형국이라면 미국은 이 틈바구니에서 빠져나오고 싶거든요. 그리고 以北하고 관계 개선하는 것이 미국의 국익에 더 부합되기 때문이죠』
 
  ―이런 구도가 전개되면 가시적으로 몇 가지 예측이 가능할 것 같은데요. 『우선 미국은 북한에 호의적으로 대응하려 할 것입니다. 각종 제재도 완화할 것이고, 경제지원도 추가되겠지요. 미국은 월맹을 지원하지 않은 점을 후회하고 있으니까요』
 
  ―국내에서는 어떤 일들이 벌어질 것이라고 봅니까. 『어떤 형태로든지 북한을 돕거나 북한을 지지하는 단체가 늘어날 겁니다. 하층 통일전선의 일환이지요. 빠르면 이번 가을 학기쯤 대학가에서는 학교마다 인공기와 태극기를 함께 걸어두고 「축하합니다」라는 식의 선전을 할 겁니다. 이걸 막을 수가 없게 되었어요. 내년쯤엔 親北단체가 정당을 만들겠다고 나올 겁니다. 그때쯤이면 얼이 빠졌던 한국 사람들이 「이게 아니구나」 하겠지요. 문제는 현재 우리나라에 제대로 된 보수정당이 없다는 데 있습니다. 정당이 제 기능을 못한 채 분열되어 있고, 반면 진보라는 쪽은 조직력이 막강하고 외부(북한)로부터 지원도 있고…』
 
 
  金九 선생과 金大中 대통령
 
  ―頂上회담 전에 金대통령께 이런 내용으로 자문하시지 않았습니까. 『어느 자리에 초청을 받아 士林의 대표로서 말씀을 드렸어요. 「이번에 대통령을 모시는 것은 金日成이 金九 선생을 北에 모셔간 것과 똑같습니다. 한번 점검해 보고 올라가십시오. 대한민국 대통령의 格을 가지고 올라가시는 길입니다. 가셔서 어떤 합의서에도 서명하지 마십시오. 그저 만나고 왔다는 것으로도 충분합니다. 대한민국 대통령의 格에는 4500만 국민의 명예가 달려 있습니다」라는 내용으로 말씀을 전했습니다. 표정이 굳어지시더군요』
 
  ―李교수께서는 金九 선생의 訪北과 같은 맥락으로 보십니까. 『이번에 金九 선생 51주기를 맞았는데 金大中 대통령은 그분을 몹시 그리워하시더군요. 당시 金九 선생은 「金日成도 조선사람 아니냐. 우리끼리 우리의 민족 문제를 논하는데 내가 가서 타이르면 그들도 민족인데 어떻게 반대를 하겠느냐. 내가 가겠다」며 나선 겁니다. 그러나 가능한 일이 아니었지요. 당시 정치인 중에 북한체제의 본질을 안 사람은 李承晩 박사 정도뿐이었습니다.
 
북한은 金九 선생을 데려가 어떻게 이용했습니까. 「미국이 한반도를 나누는 걸 金九 선생이 막으려고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고민하다 보니 막을 사람은 金日成 장군밖에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고, 그래서 老軀(노구)를 이끌고 金日成 장군을 찾아와 미국을 막아달라고 부탁하고 갔다」는 것 아닙니까』
 
  ― 李교수께서는 現 사태를 너무 비관적으로 보시는 것이 아닙니까. 『나는 조심스럽게 낙관합니다』
  ―지금까지 낙관적인 말씀은 한 번도 안하셨는데요.  『우리 대한민국 체제가 50년 동안 이만큼 성장했습니다. 체제 성립 이전부터 지금까지 남북한 양쪽을 다 보려고 노력하며 살아왔어요. 낙관의 근거가 무엇이냐 하면, 대한민국의 자유민주주의 체제가 갖는 자발적 힘이 성장해 왔고 지금도 존재한다는 겁니다. 북한은 한국 사회의 底力을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북한의 착각
 
李교수는 북한이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속성을 너무 모르고 있다는 점을 설명했다. 북한으로 말하면 일당지배체제, 일인 독재국가이니 「黨이 지시하면 우리는 따른다」는 전체주의 시스템이 형성된 국가이지만, 우리의 경우, 정부나 대통령이 나서서 하라고 해도 거부하는 자유 시민의 권리행사에 익숙해져 왔다는 것이다. 이것이 종국에는 힘을 발휘한다는 말이다.
 
『북한과 달리 우리 사회에서 정치란 일부분입니다. 쉽게 말하면 정치가 날아가도 대한민국은 움직입니다. 10·26을 생각해 보세요. 권력이 대통령에게 집중되었던 당시에 朴대통령 有故(유고)가 발표되었지요. 하지만 버스는 제 시간에 다녔고 병원은 환자들을 받아 치료했지요. 은행에 가면 예금한 돈을 찾는 데 무슨 불편이 있었습니까? 회사원에게 이 사건으로 월급이 안 나왔나요? 우리 사회의 99%는 제대로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바로 이것이 자발성의 무서운 힘입니다.
 
그러나 북한은 배급기관인 정치가 날아가면 自活능력이 제로에 가깝게 떨어집니다. 무질서로 변하는 것이죠. 북한은 우리를 자신들과 같다고 착각하고 있어요. 우리 대통령이 한 마디 하면 재벌이 돈 싸들고 북한으로 달려가는 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게 아닙니다. 現代도 그들 나름의 이익을 가지고 움직이는 겁니다. 그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대통령과 보조를 맞추면서 북한에 투자하는 겁니다. 대통령이 三星에게 「당신, 손해보더라도 북한에 이것 다 해줘라. 국가의 정책이다」라고 하면 이 말이 통할 것 같습니까?』
 
  ―그런 경우, 즉 정치가 작동불능 상태에 빠질 때 자발성이 나오는 것은 결국 보수세력에서 기인할 것인데 교수님은 그 수가 얼마나 된다고 보십니까. 『보수對 진보가 2對 1 정도라고 봅니다』  
  ―여론조사에서는 그렇게 나오지 않던데요. 『요즘 여론조사, 나는 안 믿거든요』
 
 
  진보세력과 親北세력 분리가 문제
 
  ―조직되지 않은 2의 보수세력이 조직화된 1의 진보세력을 이길 수 있다고 보십니까. 『북한의 착각 중 하나가 바로 그겁니다. 북한은 남한의 진보세력이 전부 자기네 親北세력인 줄 알고 있거든요. 우리나라의 진보세력 속에 親北세력이 숨어 있는 겁니다. 현재 진보세력 안에서 親北세력을 골라내는 일은 같은 사회에서 살아오는 우리에게도 어려운 일이어서 안타까웠죠』
 
  ―진보세력과 親北세력은 어떻게 구분합니까. 『親北세력은 극소수이고, 이들은 북한정권과 같은 생각을 갖고 있는 전통적 공산주의자들입니다. 이들 입장에서 대한민국은 反動국가이죠. 그런데 아이러니컬한 것은 「진보」세력의 대부분은 본질적으로 가장 反共적인 감상적 자유주의자들입니다.
 
이들과 공산주의와는 相剋(상극)인데 함께 공존하고 있어요. 이렇게 된 데에도 북한이 기여한 바 큽니다. 정부가 反체제 親北세력을 강력하게 탄압하다 보니 결국 대한민국 체제에 결점이 생긴 겁니다. 민주국가이면서도 인권을 탄압하는 모순을 드러내는 것이죠. 여기에 민주주의와 인권을 강력하게 요구하는 감상적 자유주의자들이 정부에 대항했죠.
 
親北세력들은 이들과 연합전선을 펴온 겁니다. 현재 우리나라의 진보세력은 「親北세력과 감상적 자유주의자들의 연합전선」이라고 정의 내릴 수 있어요. 金대통령으로서도 골치 아플 겁니다. 북한은 한쪽은 위장을 한 것이라 보죠. 일종의 잠복입니다』
 
  ―오랫동안 잠복해 있던 親北세력들은 앞으로도 그럴 가능성이 큰 것 아닙니까. 『그런 면에서 이번 6·15 남북 頂上회담의 「바람」은 우리에게 유리한 측면도 있어요. 이들이 「때」가 왔다고 과감하게 스스로 노출하기 시작할 겁니다. 중국에서 毛澤東이 百家爭鳴(백가쟁명)을 주창하고 言者無罪(언자무죄)라는 방침도 내렸죠. 마음을 놓은 지식인들이 자신의 성향을 털어놓기 시작했고 종국에는 중국 공산당 비판의 표적이 되어 숙청됩니다. 지금 우리 사회에서는 신문 방송을 보다 깜짝깜짝 놀랄 때가 많죠. 하나씩 본심을 밝히기 시작하니 그렇습니다.
 
우리는 선거라는 기회가 있습니다. 그때 다른 정권을 세울 수 있다면 지금 이 사태는 百家爭鳴이 되는 것이죠. 우리에게도 체제를 대대적으로 정비할 수 있는 기회가 될 수 있을 겁니다』 ●

 [월간조선 2000년 8월호, 李東昱 前 月刊朝鮮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