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생각하는 인물 「송재(松齋) 서재필(徐載弼)」

  

 

한국인 최초의 서양의사 서재필(徐載弼) 박사의 본관은 달성(達城)이며, 호는 송재(松齋)이고, 영어명은 필립 제이슨(Phillip Jaisohn)이다. 서재필 하면 독립운동가 혹은 독립신문 발행인으로만 널리 알려진 이름이다. 따라서 일반인들 사이에는 한국인으로서 최초의 서양의사였다는 사실에 대해선 별로 알려져 있지 않다. 서재필 박사는 1889년 조지워싱턴대학에 수학하면서 당당히 의사 자격을 따냈고, 졸업후 잠시나마 병리학교실 조교수로서 세균학을 연구했다. 당시 세균병리학은 오늘날 임상병리학의 전신(前身)에 해당하는 분야이고, 필자는 1989년과 1990년 미국 연수생활중 필라델피아에서 서재필 박사의 족적을 자주 만날 수 있었던 관계로 관심을 갖게 되었다.  

필라델피아 서쪽 24km쯤 떨어진 미디어시의 언덕숲에 위치한 徐박사의 자택은 딸 뮤리엘 여사가 숨진 88년 이후 서재필기기념관으로 보존되어 있다. 3층 목조건물인 이 기념관안에는 86년 유품 5천점이 한국으로 돌아간 뒤에도 의학서적과 당시 일본의 정세를 나타내는 서적 등 장서 8백여권이 빽빽히 2층 서재에 꽂혀있다. 또 1층 거실을 비롯한 각 방에는 徐박사가 독립을 호소하면서 각국 정부와 교환했던 문서 사본들, 컬럼비아대학(현 조지워싱턴대학) 의학부 졸업사진과 역사적 시기마다 늘 모습을 드러내었던 徐박사를 담은 대형사진들이 방문객을 엄숙하게 한다. 현재는 바로 옆에 기념재단측이 세운 별채에서 유학생과 교포들이 살면서 집세대신 기념관을 관리하고 있다. 이 밖에 기념관에서 10분 거리에 위치한 로즈트리공원 한가운데에는 한인회가 세운 대형 대리석 기념비에 이정식(李庭植) 교수와 고 이은상(李殷相)씨가 각각 쓴 비문이 새겨져 이곳을 찾는 일들의 눈길을 끈다.히 기다리고 있다.

   [2001. 4.7., 조현찬]


송재 서재필(松齋 徐載弼) 약력

전남 보성(寶城)에서 보성군수 서광언(徐光彦)의 둘째 아들로 1864년(고종 3년) 11월 28일에 출생했다. 일곱살 때 서울에 올라와 외숙인 판서(判書) 김성근(金聲根) 밑에서 한학을 배웠다. 먼 친척뻘인 김옥균은 나이 열 한두 살밖에 안된 어린 서재필이 사서삼경(四書三經)을 줄줄 외는가 하면, 열세 살(1879년, 고종 16년) 때는 임시로 보는 과거시험인 전강(殿講)에서 장원하는 것을 보고 무릎을 탁 쳤다고 한다. 만18세이던 1882년 과거에 합격한 서재필은 교서관(校書官) 부정자(副正字) 벼슬에 있으면서 김옥균의 권유로 일본의 도쿄 도야마(戶山) 육군유년학교(陸軍幼年學校)에 1883년 일년간 유학했다. 서재필은 게이오(慶應)에서 일본어를 배우며 선진국 일본의 제도와 문물을 눈여겨 보기도 했다.

만20세가 된 1884년7월에 귀국한 서재필은 국왕에게 사관학교의 설립을 진언하고 20세에 조련국(操鍊局)의 사관장으로 개화파 지도적 청년들 가운데 한 사람이 됐다. 그리하여 5개월 뒤 김옥균(金玉均)과 홍영식(洪英植) 등이 일으킨 갑신정변에 참여해 병조참판 겸 정령관(正領官)으로 임명됨과 동시에 병사들을 지휘하고 국왕을 호위하는 임무를 맡았다. 그러나 갑신정변은 3일 천하로 끝나면서 서재필은 김옥균, 박영효(朴泳孝), 서광범(徐光範) 등과 함께 일본으로 망명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한편 그가 역적으로 몰림에 따라 그의 부모 아내 형은 음독자살했고 동생은 참형됐으며 두살배기 아들은 돌보는 이가 없어 굶어죽었다.

開化運動의 巨木

일본은 이 망명객들을 냉대했다. 이에 서재필은 미국으로 건너갔다. 거기서 막노동으로 생계를 이으며 교회에 나가던 그는 곧 기독교를 받아들이게 됐고, 이것을 계기로 기독교적 인권사상과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신념을 키 울 수 있었다. 서재필은 펜실베이니아주의 윌크스바레에서 탄광을 경영하는 홀렌백을 만나게 됐다. 서재필이 걸어온 길에 감명을 받은 홀렌백은 그를 힐맨 아카데미라는 명문 고등학교에 입학을 시켜주었다. 이 때부터 그 는 필립 제이슨(Philip Jaisohn)이란 미국식 이름을 쓰기 시작했다. 서재필은 그 뒤 수도 워싱턴에 자리잡은 오늘날의 조지워싱턴대 의과대학의 전신인 컬럼비아의과대학에서 공부해 만28세이던 1892년 의사가 됐다. 우리나라에서는 그를 「서재필 박사」라고 부르는데 우리가 흔히 말하는 박사 학위를 받은 것은 아니었고, 의사라는 뜻의 닥터가 박사로 번역됐기 때문이었다.

그는 조선 사람으로 제일 먼저 미국 시민권을 받은 사람이 되기도 했지만 제일 먼저 미국의사가 된 사람이기도 했다. 8년 가까운 미국 생활은 서재필로 하여금 근대적 민주주의 사상과 제도에 대한 믿음을 더욱 강하게 갖게 했다. 이러한 안목에서 조국을 돌아볼 때 그의 피는 끓지 않을 수 없었다. 조선은 여전히 열강의 각축장이 된 채 외세 종속적이면서 후진적인 사회로 정체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나마 조선에서도 갑오경장이 실시되면서 여러 방면에 걸쳐 개혁이 추구되기 시작한 것이 다행이었다. 갑신정변의 역적죄도 사면됐고 조선 조정은 그를 중추원 고문으로 초청했다. 서재필은 조국의 개혁작업에 봉사하겠다는 뜻을 안고 자신의 병원을 정리한 뒤 1895년12월 귀국했다. 그의 나이 만 31세로 11년만의 귀국이었다.

1896년 귀국 하여 중추원(中樞院) 고문에 임명되었다. 정부예산을 얻어 1896년 4월 7일에 창간한 《독립신문》은 그 영어판인 《The Independent》도 함께 간행했는데, 둘 이상의 언어로 같은 신문을 동시에 발행한 것은 동아시아 신문 역사상 최초의 일이었다. 한편, 이상재(李商在) ·이승만(李承晩) 등과 독립협회(獨立協會)를 결성하고 모화관(慕華館)을 인수 ·개축하여 독립회관으로 하였고, 1897년에는 영은문(迎恩門)을 헐고 그 자리에 독립문을 세웠다. 배재학당에 출강해 젊은이들에게 자유민주주의를 가르치기도 했는데, 이 때 李承晩도 그의 강의를 듣고 깊은 감명을 받았다. 서재필의 국민계몽 운동이 점차 민중운동으로 확대됨에 따라 수구파(守舊派) 조정과 일본 및 러시아의 반발을 불러일으키게 됐다. 조정은 마침내 그의 중추원 고문직을 빼앗고 출국을 강요했다. 그는 1898년 5월 두번째로 조국을 떠나 미국으로 돌아갔다.

하지(Hodger,G.R.) 장군 고문맡아

미국으로 돌아간 뒤로부터 1919년 3월1일 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날 때까지 약 21년 동안 서재필은 주로 인쇄업이나 문방구업에 종사했다. 3 ·1운동 소식을 전해 듣고는 잡지 《The Evening Ledger》와 제휴, 한국문제를 세계 여론에 호소하는 한편 한인친우회(Friend of Korean)를 조직, 재미교포들을 결속하여 독립운동후원회를 만들었다. 그 후 상해임시정부와 긴밀한 연락을 취하며 외교위원장 자격으로 활약, 1922년 워싱턴군축회의에 독립을 청원하는 연판장을 제출하고, 1925년 호놀룰루의 범태평양회의에 한국대표로 참석, 일본의 침략을 폭로 ·규탄하였다. 이 과정에서 그는 자신의 시간과 재산을 거의 다 바쳤다. 그 때문에 건강도 상했지만 파산상태에 이르렀다. 그래서 1925년부터 47년까지 22년 동안 병리학자 또는 의사로서 조용히 생활했다.

그러나 미군정은 노령의 서재필을조국으로 불러냈다. 미군정은 남한에 단독정부가 서게 되는 경우에 대비해 46년 말부터 미군정의 「한국화(韓國化)」를 추진 했다. 미군정의 주요 업무들을 남한 사람들에게 점진적으로 넘기는 작업을 그렇게 불렀고 그래서 민정장관직을 신설해 안재홍(安在鴻)을 임명했던 것이고, 미군정청을 47년 6월3일부터 남조선 과도정부라고 고쳐 불렀던 것이다.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 개화운동의 지도자였고 독립투쟁의 큰 어른인 서재필을 하지 사령관의 고문 겸 남조선과도정부 특별의정관으로 초빙하게 됐던 것 이다.

이 무렵 「한국화」조처에 따라 남한만의 군대도 서서히 만들어져갔다. 46년1월 미육군중령 마셜을 사령관으로 해 1개대대 규모로 출발한 남조선 국방경비대는 47년12월에는 3개여단 규모로 커졌고, 해방병단(海防兵團)으 로 출발한 해군은 47년8월부터 미해군을 대신해 남한의 해안 전역을 경비 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무려 반세기만에 귀국한 서재필은 동포들의 큰 기대를 불러일으켰다. 그가 1947년 7월1일 인천항에 도착했을 때 이승만(李承晩), 김규식(金奎植), 여운형(呂運亨), 안재홍(安 在鴻) 등 당대의 정상급 지도자들이 영접을 나갔다는 사실, 그의 귀국을 환영하는 대회가 이승만, 김구, 여운형을 명예위원장으로 하고 3·1운동 33인 의 한 사람인 오세창(吳世昌)을 위원장으로 해 5만명 정도의 시민들이 참석한 가운데 성대히 열렸다는 사실 등이 그 점을 말해 주었다.

동포들은 겨레를 위해 평생을 희생한 선각자를 잊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서재필은 자신이 한국말을 잊어버렸으며 한국 사정을 잘 알지 못한다는 점을 솔직하게 시인했다. 그러나 『힘을 다하여 한국 인민들을 도와주려고 한다』고 다짐했다. 그러면서도 『나는 권한이 없는 사람이며 다만 하지 사령관에게 진언할 따름이다』고 덧붙였다. 서재필의 집무실은 중앙청의 207호실이었다. 그는 숙소인 조선호텔로부터 매일 출근해 성실하게 근무하는 한편, 매주 금요일 서울중앙방송국을 통해 주로 자유민주주의의 이념과 제도를 설명하고 우리 국민이 걸어야 할 길을 강의했다. 그의 방송은 영어로 이뤄졌기 때문에 손금성(孫金星) 박사가 꼭 통역을 했다. 서재필의 방송 내용의 핵심은 한국이 통일 독립되고 번영하려면 자유민주주의를 착실하게 운영해야 한다는데 있었다. 그 때 온 겨레가 열망하던 민족통일의 비결도 자유민주주의의 실현에 있다고 그는 외쳤다. 공산주의와 같은 당 독재체제 아래서 인간은 자유로울 수 없으며 독립된 인격을 가 질 수 없는 만큼 국민의 힘이 모아지지 않음에 반해, 자유민주주의 아래서는 인간이 인간답게 살게 됨으로써 국민의 힘이 저절로 모아져 통일의 원동력으로 작용하게 된다는 뜻이었다.

"불출마"발표 美國行

국민의 자유를 강조하면서도 서재필은 국민의 책임을 역설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권한을 행사하는 만큼이나 의무를 수행해야 한다고 가르친 것이다. 이상에서 살폈듯이 서재필의 활동은 국민 교육과 계몽에 치중됐다. 그는 미군정으로부터 귀국 교섭을 받았을 때 『나는 연로했고, 원래 지위와 권세에는 아무런 뜻이 없으며 오로지 동포들의 교육과 계몽에 힘쓰고 싶다』 고 말했었는데, 그 다짐에 충실했던 것이다. 그러나 정계는 서재필의 적극적인 정치참여를 바랐다. 특히 김규식이 그러했다. 「코리아에 관한 모스크바 의정서」를 실현시키는 것이 민족통일의 기본 요건이라고 믿었던 김규식은 그 첫 단계로 좌우합작을 성사시키고 그 다음 단계로 미소 공동위원회를 성사시켜야 한다는 구상을 갖고 서재필에게 접근했던 것이다. 미군정은 김규식과 서재필의 제휴를 바랐다. 서재필이 민중사이에 인기가 높고 존경을 받고 있음을 확인한 미군정은 두 사람의 제휴가 성립되면, 그 무렵 미군정이 뒷받침하던 김규식 노선이 현실적으로 큰 지지를 얻게 되리라고 판단했던 것이다. 서재필은 기본적으로 김규식의 노선에 동의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나이가 많음을 내세우며 정치활동에 참여하기를 사양했다.

서재필을 정계로 끌어내려는 시도는 48년 6월1일 이후 계속됐다. 5·10 총선이 끝나 제헌국회가 개원한 그 다음날인 이날, 정일형(鄭一亨), 백인제(白麟濟), 이용호(李容卨) 등을 비롯한 지도층 인사들이 서재필을 대한민국의 초대 대통령으로 추대하려는 운동을 시작한 것이다. 그들은 6월11일 서재필에게 보내는 간원문(懇願文)을 마련했다. 『지금 조국이 요구하는 사람은 명령하는 사람이 아니라 인민의 뜻을 알아서 이에 충실히 순종하는 정직한 민주주의적 지도자입니다. 이 나라에는 그러한 인격자가 한분 계시니 그는 徐박사입니다』라는 문구로 시작되는 이 편지는 서재필이 「정계 최고지도자로 출마하시기를」 간청했다. 이 운동은 6월29 일 「徐박사추대 연합준비위원회」를 조직하기에 이르렀다. 이 운동은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추대하려는 대한독립촉성국민회의에 의해 공개적으로 견제됐다. 이에 서재필은 7월 4일 불출마 성명을 발표했다. 그래도 제헌국회가 7월20일 대통령을 선출할 때 그에게 1표가 나왔다. 그러나 그가 미국 시민권자임을 이유로 무효 처리됐다. 서재필은 이미 미국으로 돌아갈 결심을 굳힌 터였다. 그래도 그는 마지막으로 옛 제자인 이승만을 만나 5·10 총선에 불참한 김구, 김규식 등의 남북협상파를 끌어안을 것을 권유했다. 서재필은 48년9월11일 미군용선 하지호를 타고 인천항을 떠났다. 필라델피아 근교 메디아로 돌아간 그는 80대의 노구에 의사 생활을 재개했고, 1951년 1월5일 만87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정부에서는 독립신문이 창간된 4월 7일을 신문의 날로 정하고, 1977년에는 선생에게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는 한편,  1994년 4월8일 애국지사 추모사업으로 미국의 필라델피아에 있던 선생의 유해를 봉환해 국립묘지에 안장하고, 1996년 4월의 문화인물에 선정했다. 또한 송재 서재필 선생의 얼을 기리고 호국정신과 민족적 자긍심을 고취한다는 취지하에 1992년부터 2만여평의 부지에 국·도비 등 115억원을 투자하여 전남 보성군 문덕면 용암리 생가를 복원하는 것을 비롯하여 동상과 독립문 건립, 박사의 글씨와 독립신문 등 관련 유물을 전시하는 전시관, 조각공원 등을 조성하였다.

어록

△『사람은 모두 하나님께서 내셨다. 그러므로 사람은 사람을 짐승처럼 부려서는 안되고 하나님께서 주신 그 사람의 권리를 존중해 주어야 한다』 (1898년 10월 16일 독립신문 논설) △『세상에 불쌍한 인생이 조선 여편네다. 여편네가 사내보다 조금도 낮 은 인생이 아닌데 사내들이 천대하는 까닭은 사내들이 개화되지 않은 데 있다』(1896년 4월 21일 독립신문 논설) △『일본은 한국에 가한 잘못을 교활하게 은폐하고 있다. 우리는 이 사 실을 미국에 알려 미국으로 하여금 한국의 독립을 지지하게 만들어야 한다 』(1919년 4월호 「코리아 평론」논설) △『조선의 청년들이여, 그대들의 인생의 최고 목적은 조국을 위한 의무 를 다하는 것이다. 조국은 여러분이 정직하고 정의롭기를 기대한다』(1930 년대에 쓴 글) △『한국이 통일되는 그 날이 빨리 오게 하려면 우리는 민주주의를 실천 해야 한다』(1947년 7월 1일 귀국 인사)

 

[2001년 12월31일]


 

최초의 서양의사    사1호  서재필

서재필(徐載弼) 선생하면 한국인의 귀에는 독립운동가 혹은 독립신문 발행인으로만 널리 알려진 이름이다. 그러나, 서재필 선생이 한국인으로서는  최초의 서양의사였다는 사실에 대해선 별로 알려져 있지 않다. 서재필 선생은 1888년에 미국의 라파에트 대학, 1889년 워싱턴 대학에서 세균학을 전공하고 당당히 의사 자격을 따낸 한국인 최초의 서양의사이다. 그러면, 서재필 선생을 보다 깊이 조명해보기 위해서 그의 성장 과정 및 파란만장한 일대기를 간추려 보기로 한다.  

 서재필은 고종 3년 1866년 10월 28일 전남 보성에서 보성군수 서광언(徐光彦)의 둘째 아들로 때어났다. 그는 일곱 살 때부터 서울에 올라와 판사(判事)의 지위로 있는 외삼촌 김성근(金聲根) 댁에서 공부를 하였다. 서재필은 외삼촌 김성근 댁에서 공부를 하는 동안 개화기의 정치가인 김옥균(金玉均)을 자주 만나게 되었다. 김옥균은 나이 열 한두 살밖에 안된 어린 서재필이 사서삼경(四書三經)을 줄줄 외는가 하면, 열세 살 때는 임시로 보는 과거시험인 전강(殿講)에서 장원하는 것을 보고 무릎을 탁 쳤다.  "김판서, 재필이는 이 시대에 보기 드문 총명한 아이오.  재필이를 보니 이나라 조선도 머지 않아 개화의 꿈이 이루어질 것만 같소이다."   "무슨 과찬의 말씀을."   "과찬이 아니라 사실이오. 난 재필이를 어서 성장시켜서 나의 동지를 만들겠소이다."

이렇듯, 김옥균은 외삼촌인 김성근보다도 서재필을 더 사랑하고, 장래에 대한 기대에 대해서도 남달리 많은 관심을 가졌다.  이러다 보니 서재필은 나이가 들어갈수록 김옥균이 주장하는 개화의 사조에 동조하게 되고 급기야는 개화파의 중심 인물로 활약하는 위치까지 가게 된다.  

개화에 관심을 둔 김옥균, 홍여식, 서광범, 서재필 일행은 개화에 대한 의논할 일이 생길 때마다 주위의 눈길도 피할 겸 비밀을 유지하기 위하여 인적이 드문 한가한 곳을 찾곤 했었는데, 어느 날은 그 장소를 봉원사로 정한 적이 있었다.  봉원사에 닿은 김옥균 일행은 스님의 안내를 받아 조용한 승방에 앉아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한창 나누는데 스님으로부터 이상한 청을 받게 된다.  "외람된 말씀 같지만, 잠깐 방을 다른 곳으로 옮길까요?"   "꼭 옮길 까닭이라도 있소이까?"   "소승이 신기한 것을 보여드릴게 있습니다."

김옥균의 일행은 누구라고 할 것 없이 난처한 표정만 짓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한쪽 구석지에서 잠자코 이야기만을 듣고 있던 스님이 난데없이 끼여들더니만 방을 옮기자고 하니 난처할 수밖에 없잖은가.  이때 서재필이 나서서 난처한 분위기를 환기시킨다.  "남의 청을 안받아주거나, 무시한 처사도 결국은 개화사상에 위배되니 스님의 청을 들어주도록 합시다."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스님은 자기의 청을 들어준데 대하여 고맙다는 듯이 합장의 예의를 갖추고 나서 김옥균의 일행을 절 뒤에 있는 으슥한 방으로 안내하는 것이었다.  스님은 이상한 상자 하나를 꺼내더니만 일행에게 그 안을 들여다보라고 권하다.  맨 먼저 그 상자를 들여다 본 김옥균은 까무라칠 정도로 놀라고 만다.  그 안에는 김옥균으로서는 생전 처음 보는 사진들이 요지경처럼 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서양은 어는데 조선은 뭐야.  자, 재필이 한번 보게나."   김옥균으로부터 그 이상한 상자를 받아들고 그 안을 들여다보자 스님은 친절하게도 사진 설명까지 곁들여주는 것이었다.   "이것은 영군의 런던이요, 이것은 포르투갈의 군대랍니다."

사진이라는 것을 처음 본 것도 신기했지만, 조선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발달된 영국의 런던이며, 포르투갈 군대의 모습에서는 분노마저 치밀 지경이었다.  "스님의 정체는 무엇이오?"   서재필은 그 이상한 상자 속의 사진을 보여준 스님의 저의가 궁금하여 질문인 듯 추궁인 듯 거친 탁음을 내뱉었다. 그러자, 스님은 염주알을 손바닥 사이에 정중히 낀 합장의 예의를 보여주고 나서 자신의 신분을 침착하게 밝히는 것이었다.

  "소승은 부산의 통도사에서 불경을 외는 이동원(李東元)이라는 사람입니다.  일찍이 일본말을 배워서 일본을 몇 번 다녀온 경험이 있습니다.  지금 일본은 서양문화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여서 뒤떨어진 자기 나라 문명을 채우느라고 정신이 없습니다.  그런 일본의 실태를 보고 우리 조선도 하루바삐 서양문화를 받아들여야 한다고 소신을 밝혔더니, 오랑캐가 아니냐면서 잡아가두려는 통에 이 절까지 피신을 왔습니다."

그제서야 서재필을 비롯한 김옥균 일행은 그 스님에 대해서 안심을 하고 오히려 조선을 개화하는 데 좋은 묘안이 있으면 알려 달라고 협조를 요청하였다.  아무튼 그날 이후부터 서재필은 조선의 개화에 대해서만은 김옥균과 더불어 더욱 신들린 열정을 갖게 되었다.  개화가 되지 않으면 조선은 언젠가는 제2의 임진왜란을 초래할지도 모른다는 걱정을 항상 지니고 다녔다.  서재필은 일본 유년학교에 들어가 2년간의 수업을 마치고 1884년 5월에 귀국하여 고종 앞에서 군사 시범훈련을 보여주기도 하였다.  서재필과 개혁의지, 서재필과 김옥균과의 인연, 이런 관계들은 마침내 우리 역사상 3일천하라는 갑신정변으로 이어지고 만다.  갑신정변은 서재필의 운명을 뒤바꾸어버린 충격적인 계기나 다름없다.  이 계기가 없었더라면 서재필은 어쩌면 최초의 한국인 의사가 되지도 않았을 것이다.  여기서 서재필의 운명에 결정적 충격을 던진 갑신정변에 대하여 살펴 보기로 하자. 

1884년 10월 17일은 우리나라 처음으로 세워진 통신관청인 우정국(郵政局)의 낙성식 날이었다.  우정국 총판 홍영식이 베푼 이 연회석에는 미국 공사, 영국 공사 등 외국 사절 20여 명과 함께 공교롭게도 개화파 서재필을 포함한 김옥균 일행과, 그것을 반대하고 청나라를 대국으로 섬겨야 한다고 고집 하는 수구파의 민영기, 한규직, 이조연 등이 자리를 같이하게 되었다.  이날 낙성식의 연회는 오후 6시를 넘기면서부터 그 흥이 한층 돋구어지기 시작했다.  이 흥의 여세를 타고 김옥균은 옆자리의 일본 공사관 시마무라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건냈다.  "시마무라 공사관, 천(千)을 아시오?"  그러자, 시마무라 공사는 손에 든 술잔을 비우면서  "요로시(좋아)!" 하고 큰 소리로 대답을 하였다. 김옥균과 시마무라 공사관이 주고받은 '천'과 '요로시', 그것은 개화파와 일본 사이에 사전에 약속된 이날 행사 도중에 무슨 일인가를 실행하기 위한 어떤 암호였다.  물론 이런 사실들에 대해서는 수구파 사람들은 전혀 모르고 있었다.

 이 연회가 절정에 이르렀을 무렵, 우정국 북쪽 창문에서 난데없이  "불이야!" 하는 소리가 귀청을 때리며 들려왔다.  이 바람에 연회석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고, 놀란 민영익은 방문을 걷어차고 밖으로 뛰쳐나갔다.  뒤이어 한규직이 나가려고 하는데 앞서 나갔던 민영익이 개화파와 밀약된 일본군의 칼에 찔려 방문을 향해 비명을 지르며 고꾸라지는 것이었다. 수구파가 하나 둘씩 쓰러지자 기세가 당당해진 개화파들은 이날의 암호인 '천'을 외치며 일본 공사관이 있는 교동 쪽으로 달려갔다. 그러나 청나라 군대의 반격과 개화파를 위해서는 끝까지 싸워주겠다던 일본 군대가 느닷없이 중립을 표방하며 청나라의 반격에 맞서주지 않음으로 해서 개화파의 꿈은 무참히 사그라지고 말았다. 서재필은 개화의 꿈을 이루려다 단 3일만에 그 꿈이 무산되어버린 3일천하의 쓰라린 혁명을 고뇌하며 서울을 간신히 빠져나와 인천에서 망명의 배를 타야만 했다.  이로 인하여 서재필 일가족은 비참한 생을 마감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형졸의 칼에 죽었는가 하면, 부인은 시부모를 따라 자살하였고, 두살박이 아들은 돌봐주는 사람이 없어서 굶어 죽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서재필은 일본에 얼마 동안 머물다가 미국의 샌프란시스코로 건너왔다.  여기에는 아무런 연고지도 없었다.  살기 위해서 무작정 미국까지 건너왔다고 하여도 지나친 말은 아니었다.  서재필은 언어 소통의 장애 요인인 영어를 배울 겸 메이슨가의 교회에 몸을 의지하기로 하였다.  그는 여기에서 로버츠라는 실업가를 알게 되었고 우연히도 펜실베니아 대학의 이사이자 광산가인 로버츠의 친구인 홀넨백이라는 사람의 도움을 받아 정규 학업을 익힐 수 있게 되었다.  3년 후 서재필은 라파에트 대학에 입학을 하였다.  대학 2학년 때 그를 돌봐주던 화학 교수인 하트 씨가 세상을 갑작스럽게 떠나버리자 하는 수 없이 학교를 중퇴하고 만다.  이 때 고생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심했다.  하루하루를 살아간다는 것조차도 괴롭고 피곤할 뿐이었다.  그는 생계대책이 마련되지 않자 백악관으로 가서 다짜고짜로 당시의 대통령인 클리이블런드 대통령을 만나겠다고 떼를 쓰기도 했다.  이 무렵 운좋게도 군의총감부(軍醫總監府)에서 동양문 번역관 모집이 있었는데, 그는 여기에 무난히 합격을 하였다.  

 이 일이 동기가 되어 서재필은 다소 돈의 여유를 가질 수 있게 되었고, 조지 워싱턴 대학 의학부에 입학도 하게 되었다.  서재필은 조지 워싱턴에서 세균학을 전공하여 한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의사 자격을 따냈던 것이다. 서재필은 그 대학을 졸업한 후 가아필드 병원에 근무하면서 모교 대학의 강의도 맡았다. 1895년 서재필은 과거의 어둡고 괴로운 늪에서 빠져나와 미국 철도우편 창시자인 조지 암스트롱 대령의 딸과 결혼하고, 그 이름도 필립 제인슨이라고 새로 지었다. 그러나 그의 머리 속에서는 언제나 조국의 산천이 푸르게 자라나고 있었다.  12년만에 옛 동지인 박영효를 워싱턴에서 만나 박영효로부터 조국의 소식을 전해들은 그는 다시 조선으로 돌아갈 것을 결심한다.

서재필이 조국 서울로 돌아왔을 때는 민비는 이미 을미사변의 재물이 되어버렸고, 친일파를 중심으로 한 김홍집 내각이 버티고 있을 무렵이었다.  조국에 돌아온 서재필은 1896년 일본에서 인쇄기를 구입하여 우리나라에서는 처음으로 민간신문인 독립신문을 발행한다.  서재필은 독립신문의 발행을 정치적 재기의 기점으로 삼고자 독립협회를 구성해 보았지만 결국은 그 뜻을 이루지 못한 채 미국인 아내와 어린 딸을 데리고 미국으로 다시 건너가야만 했다.  그가 3·1운동 소식을 전해들은 것은 펜실베니아에서 병원을 개업하고 있을 때였다.  그는 그 소식을 듣자마자 한인친구회를 조직하여 미국의 각 신문들에 일본의 야만성을 통렬히 비난하는가 하면, 한국의 독립을 목이 메이도록 호소하는 데 앞장을 서느라고 사재를 자그만치 7만5천불이나 소비하기도 하였다.

일본 패망 후 1947년 하지 장군의 초청을 받고 과도정부의 정무관에 취임하기 위하여 조국에 돌아와보지만 어두운 정세와 이승만과의 심한 불화로 귀국 일년만인 1948년 9월 11일 인천항의 배편을 이용하여 다시 미국으로 떠나야만 했다.  그때 서재필은 배웅나온 군중들에게 유언이나 다름없는 말을 남겼다.  "조국이 통일국가를 수립하여 잘 살기 바란다.  국민이 정부의 주인이요, 정부는 국민의 종복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이 권리를 외국인이나 타인이 빼앗으려 하거든 생명을 바쳐 싸워라."

한말 개화파에 가담하여 그렇게도 어마어마한 갑신정변을 일으킨 주역이었던 서재필은 망명에서 얻은 한국인 최초의 서양의사의 기술을 한국땅에서 단 한번도 베풀지 못한 아쉬움을 남겼지만, 우리가 그를 지금까지 존경하는 것은 그의 투철한 민족관 때문일 것이다. 1951년 조국이 한창 동족의 피로 강산을 더럽히고 있을 때 미국 땅 그의 병원에서 85세의 파란 많은 생을 마친 그는 아무도 돌보는 이 없는 이국의 쓸쓸한 공동 묘지의 납골당에 안치되었다.  다행스럽게도 문민정부가 들어서면서 1994년 4월 8일 그 유해를 모셔와 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  [2001.12.  출처: 송명의 "최초의 한국인"]

  송재 서재필 박사 연보


 

1864. 1. 7. 전남 보성군 문덕면 가천리 외가에서 5형제의 차남으로 출생. 본관은 대구이고 부는 서광효.

            모(母)는 성주 이씨. 어려서 고향인 충남 논산군 구자곡면 금곡리에서 성장함. 그 후 7촌 아저씨인

            서광하(徐光夏)의 양자로 감. 부인은 안동 김씨로 세도가 김온순( 金蘊淳)의 딸.  

1871     서울에 올라와 서광하 부인의 동생이자 외삼촌인 판서(判書) 김성근(金聲根) 집에서 공부.

1879      임시 과거시험인 전강(殿講)에서 장원

1882. 3. 별시 문과에 합격

1882. 6. 임오군란 발생후 개화파의 김옥균, 서광범 등의 지도를 받음.

1883. 5. 일행 14명과 함께 일본에 유학. 慶應義塾에서 일본어 공부하고, 11월에는 동경의 하사관양성학교인 戶山陸軍學敎에

            들어가 신식 군사기술을 배움.

1884. 7. 귀국하여 개화파에 합류하고, 사관학교 설립을 국왕에 건의하였으나 성사되지 못함.

1884.12. 갑신정변에 참여하여, 병조참판 겸 후영 영관에 임명됨. 그러나 정변 실패하자 일본으로 망명.

             부모 형제 처 등 가족이 모두 희생됨.

 

1885. 4. 서광범, 박영효와 함께 미국으로 향함. 서광범은 뉴욕으로, 박영효는 다시 일본으로 돌아감.

            서재필은 샌프란시스코에 남아 낮에는 노동일로, 밤에는 YMCA에서 영어를 배움.

            펜실베니아주에서 탄광을 경영하는 부호 홀렌 백을 만나 그의 후원을 받게 됨.

1886. 9. 펜실베니아주 Wilks-Barre시의 Harry Hilman Academy에 입학하고,  87년 6월 학기말에 4학년에서

            석차 3등으로 우등생 상을 받음.  예비과정의 문과 4, 5, 6학년의 교과과목은 희랍어, 라틴어, 수학,  역사, 영어, 제2외국어,

            작문, 물리, 연설, 음악 등. 이해 이름을 Philip Jaisohn이라 하고 미국 국적을 얻음. 고교 재학시에는 교장 집에서 기숙.

1889. 6. 고등학교 졸업한 후 홀렌 백은 서재필에게 장차 선교사가 되어 한국에 가겠다는 조건으로 대학 진학을 제의했으나 거절함.

1889. 9. 펜실베니아주 Easton 시의 라파엣 대학에 입학하여 약 1년간 공부.

1890. 6. 워싱턴 디시로 가서 육군의학도서관에 취직하고, 코크란대학(현 George Washington 대학교 의과대학) 야간부에서 공부.

1893. 6. 전 과정을 이수하고 2등으로 졸업한 후 모교의 병리학 조교수로 임명됨. 세균병리학 연구.

1894, 6. 미국 철도우편사업의 창설자 조지 뷰캐넌 암스트롱의 딸과 결혼. 육군의학도서관과 모교 조교수 직을 사직하고 병원을

            개업했으나 잘 되지 않아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음.

1895. 5. 박정양이 내각 총리대신이 되어 서재필을 외부협판으로 임명하고 속히 귀국해달라고 요청했으나 서재필은 불응.

            다시 조선정부는 임명을 철회했고, 얼마 후 박영효가 워싱턴에 나타나 서재필에게 귀국을 권고함. 11월에는 주미공사관

            3등 서기관으로 임명됨.

 

1895.12. 병원을 정리하고 귀국하여, 중추원 고문에 임명되었으나 이는 실권이 없는 한직이었음.

1896. 4. 7. 독립신문을 창간. 1-3명은 순한글 논설 및 기사. 4면은 영문 기사 및 논설.

1896. 7. 2. 독립문과 독립공원을 세우려는 목적으로 정동구락부(친미파)가 주도하여 독립협회를 창립.

                 독립협회 초대회장은 안경수, 서재필은 고문. 위원으로는 이완용, 김가진, 김종한 등 관료

1897. 5. 독립관 건립.

1897. 8. 독립협회가 정치단체로 성격이 바뀌기 시작. 관료들이 탈퇴하고 소장은 윤치호.

             이상재, 남궁억 등이 주도했으며 독립협회 내에 토론회를 조직.

1897.12. 왕실의 지원, 각계각층의 모금으로 독립문을 완공함. 이 떼부터 서재필에 대한 견제가 시작되고

             서재필은 중추원 고문직에서 해임됨.

1898. 3. 독립협회 회장에 윤치호, 부회장에 이상재.

1898. 3. 9. 독립협회는 종로에서 만민공동회 개최하고 러시아인 재정고문, 군사교관의 철수와 러시아의

             절영도 조차 철회를 주장. 정부는 러시아 공사에게 군사교관과 재정고문의 해고를 통고.

             절영도 조차도 취소하여 러시아의 대한 소극정책으로 전환.

1898. 5. 서재필은 한국을 떠나 미국으로 돌아감(자진귀환?).

            서재필은 한국을 떠나면서 친구들에게 "귀국 정부가 나를 필요없다고 해서 가는 것"이라고 언급.

            중추원 고문직 남은 계약기간 7년 10개월분의 봉급 28,200원을 받아가지고 감.

            미국으로 돌아간 서재필은 미국과 스페인 전쟁 시 육군성의 지시에 따라 의사로 종군.

            그 해 12월 펜실베니아 대학에서 해부학 강좌를 맡음.

 

1898. 7. 보부상들이 황국협회 조직하여 독립협회에 대항. 독립협회는 황제가 조병식·이용익 등 보수집권자들을 척퇴할 것을 상소.

1898. 9. 중추원 회의에서 이미 폐지된 노육법과 연좌법을 부활시키려 함(김홍륙 사건).

1898.10.11. 독립협회는 민회를 열어 악법 소생 기도를 들어 내각을 성토. 정부는 법부대신 신기선을 파면.

1898.10.29. 독립협회는 관민공동회를 종로에서 열어 헌의 6조(외국인에 의지하지 아니함. 이권 양도는

                 대신 및 중추원 의장이 합동 날인할 것 등)를 상주. 황제 윤허

    11. 4. 관민공동회에 참여한 박정양 등 대신이 파면되고 부수 내각 성립.

    11. 5. 독립협회 해산과 주요인물 검거령이 내려 이상재 등 17명 체포했으나 6개월후 무죄석방.

    11.11. 만민공동회는 종로에서 협회 복설과 중추원 개혁 등을 요구하며 연좌농성 -- 민권 신장 목적.

    11.21. 황국협회는 만민공동회를 습격.

    11.26. 황제는 만민공동회와 황국협회 대표를 불러 해산을 설득. 만민공동회 해산. 황제는 독립협회 복설하고, 헌의 6조 등 수락.

    11.29. 중추원의 관료를 새로 임명했는데 50명 가운데 정부 관리 4명, 황국협회 29명, 민권파 17명

    12. 1. 민영환, 박정양 등으로 신내각 구성

    12. 6. 만민공동회는 수구파 5대신 처단을 요구.

    12.16. 황제는 민회 해산령내리고, 병력으로써 집회 저지. 이후 민중 집회는 사라짐.

1899. 1. 보수 내각으로 환원.

 

1904. 서재필은 윌크스 베리에서 디머 앤드 제이슨이라는 상회를 세움.

1914. 필립제이슨 상회로 단독 운영하면서 1924년까지 사업 번창.

1919. 3.1운동이 일어나자 필라델피아에서 한인연합대회를 개최하고 의장직을 맡음. 위원장은 이승만.

1926. 펜실베니아 의과대학에 특별 학생으로 등록하고, 여러 병원을 전전하면서 의사 생활

1936. 필라델피아에서 개업.

1947. 7월에 환국하여 미군정의 고문(남조선 과도정부 최고정무관)을 맡음. - 이승만의 견제.

1948. 미국으로 돌아감.

1951. 미국 필라델피아에서 사망

 

송재 서재필 선생과 우리의 의료 현실

                                                                               이태규 (경희의대 신경과)

늘날 많은 젊은 의사 내지 의학도들이 의업에 대한 자부심과 비전 없이 아이텐티티 위기를 겪고 있는 듯하여 안타까운 마음 금할 길 없다. 이에 송재 서재필 선생을 의사이면서 국민적 위인이라는 측면을 부각시켜 소개하고자 한다.

 서재필 박사는 의사(醫師)였다.

송재 서재필 선생은 구한말 고종 1년인 1864년 출생하여 1951년 미국에서 사망하기까지 조국의 독립을 위해 싸우다 가신 분이다. 그는 흔히 서재필 박사라고도 호칭되는데 마치 선생께서 초대 대통령 이승만 박사처럼 정치학이나 법학박사로 알려져 있는 웃지 못할 현실이다. 그러나 그는 의사로서의 박사(Medical Doctor)였다. 의사였던 선생이 박사로 널리 알려진 것은 당시 번역상의 오류였을까? 아니면 일제 시대 때 의사=박사였던 것이 지금은 그 뜻이 변한 걸까? 중요한 것은 의과대학생은 물론 거의 대부분의 국내 의사들조차 그가 같은 직업의 의사였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는 듯하다.

송재 서재필 선생은 18세의 어린 나이에 과거(별시문과)에 합격한 우 관직에 있다가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등을 도와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화 개혁으로서 갑신정변을 일으켰다(1884). 그러나 이 정변이 곧 실패한 후 천신만고 끝에 일본에 피신하여 잠시 머물다가, 배를 타고 미국으로 건너가 주경야독하여 고등학교와 야간대학(워싱턴 소재)을 졸업(1893)한 후 의사자격증을 취득, 위싱턴시(D.C)에서 개업을 하였다. 이후 다시 국내에 들어와 순 한글신문인 독립신문(1896-1899)을 창간했고, 이상재, 남궁억 등과 함께 독립협회를 창설하고 고문이 되었다. 또한 만민공동회, 협성회 등에서 중추적 역할을 했다.

이후 다시 미국과 한국을 넘나들면서 평생을 조국의 독립을 위해 헌신한 분이다. 1919년 3.1 운동 때에도 필라델피아에서 한인 연합대회를 개최하고 의장이 되었다. 선생은 한때 필라델피아에 있는 펜실베니아 의대(Univ. of Pennsylvania)에 특별학생으로 있었고(1926) 이 후 병리학자로서 수 편의 논문도 내었다 한다.

선생은 미국 의사면허증 취득(1893)후 한 때 미육군 도서관에서 동양의학서적을 영어로 번역하는 일도 했다.선생은 미국에서 의사면허 취득 후 미국여자(월 뮤리엘 암스트롱)과 결혼하여 두 딸을 두었는데, 추정컨대 결혼 당시(1894) 미국 동부에 한국 여자가 있었을 같지가 없다. 당시 미국 이민자들이 모두 그러하였겠듯이 그는 미국인과 결혼한 후 미국 국적(1892)을 취득했으며 그의 미국 이름은 필립 제이슨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의 위인적인 면모가 손상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우리에게 의사출신의 국민적 위인이 과연 없는가?

식민지였던 조국 알제리의 독립을 위해 프랑스와 싸웟던 정신과 의사인 프란츠 파농, 중국 근대화의 대부로 삼민주의를 주창했던 쑨원(손문), 조국인 쿠바를 위해 외세에 대항한 공산주의 혁명가였던 체 게베라, 이들 모두가 의사 출신이었다는 사실은 조금은 알려져 잇는 듯하다. 중국 근대문학의 아버지라 존경받는 아Q정전의 루쒼(노신)도  의학도에서 뜻한 바 있어 문학가로 진로를 바꾸었다. 일본 또한 그들의 의사 출신 위인으로 미생물학자인 노구치 히데요를 추앙하고 있다. 이외에도 실존주의 철학자 칼 야스퍼스(독일), 러시아 문학가 안톤 체흡, 명탐정 셜록 홈즈 작가 코난 도일(영국) 등도 모두 의사이다. 한편 우리나라에서는 한의사 허준은 특히 동명의 TV 드라마 허준의 방영 이후 마치 성의나 영웅으로 추앙(?)받고 있는 듯하다.

하지만 우리 나라 양의사(?)의 과거와 현실은 어떠한가? 다른 나라에서처럼 널리 알려진 국민적 위인이나 영웅이 있는가? 비록 100여년에 일천한 우리 서양의학 역사지만 서재필 선생을 제외하고는 아기도 다른 나라나, 비록 과대포장이 되었겠지만 한의사 허준에 견줄만한 위인의 인식은 없다.

송재 서재필 선생이외에도 우리 나라 최초의 여의사였던 박 에스더 선생이 독립운동가 였고, 경혈론의 김봉한 선생, 외과의사이셨던 백인제 선생, 한타 바이러스의 이호황 선생 등이 있지만 이 분들은 서재필만큼은 일반 국민들에게 널리 알려져 있지를 못한다. 물론 송재 선생이 의학에 오래 종사하지 못해 의학자로서 그 학문적 업적이 출중하다 할 수 없다. 그러나 이는 손문, 체 게베라, 프란츠 파농, 루쒼 등도 마찬가지이다.

오늘날 의사 내지 의학도들의 identity 위기와 별로 희망적이지 못한 의료 현실은 보다 다각적·적극적인 대책이 필요할 것이나, 한 사람의 위인이 개개인의 진로나 동기부여에 미치는 영향이 지대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싶다. 어쨋든 필자의 사견으로는 만사지탄의 길이 없지 않으나 송재 선생을 후학들에게 그 거룩한 뜻과 더불어 널리 알리고, 선생께서 독립운동에 헌신하신 의학사상 초창기의 의사었음을 역사적 사실로 조명하여 널리 가르치는 일이 꼭 필요하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