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최초의 혈액원 개설자 윤덕선 박사

 

 

   스승 백인제 선생과(상), 백병원 시절의 수술실(하)

윤덕선 박사(1922-1996, 일송학원 명예이사장)이 국내 민간병원으로는 최초로 혈액원을 개설하여 운영했다는 이야기들이 아래와 같은 내용으로 고(故) 최기홍 교수의 유고집 한국헌혈운동사(1990)와 대한수혈학회 20년 발전사에서 발견할 수 있다.

한국헌혈운동사(1990) : 민간병원의 혈액원

백병원 외과의사이던 윤덕선(尹德善)이 미8군 121병원에 나가 혈액은행 실무를 훈련받은 후 돌아와 백병원에 부설 혈액원을 세운 것이 우리나라 최초의 민간병원 혈액원이다. 당시 외과전문 병원으로서 이름을 날렸던 백외과병원에는 하루 평균 4∼5건, 많을 때는 10여건 이상의 개복수술 환자가 있어서 언제나 혈액수급이 큰 문제가 되었다.

尹德善은 이러한 혈액수급의 문제를 자체에서 해결할 수밖에 없다는 판단 아래 미8군 121병원의 협조를 받아 직접 혈액은행에 관한 실무훈련을 받았으며, 이 훈련을 마치고 돌아와 병원 1층에 있던 검사실에 붙여서 혈액은행을 개설했다. 처음에는 미군병원의 협조를 받아 혈액을 얻어다가 사용하기도 했으며, 차차 매혈로 자체 수요를 확보해 나갔다. 채혈과 검사 및 조작 등은 모두 尹德善의 책임 아래 이루어졌으며, 후에 검사실에 근무하는 요원들을 훈련시켜 일을 맡겼다.

혈액원의 시설은 혈액을 채취해서 보관하고 검사하는 최소한의 시설밖에는 없었고 그나마도 정전(停電)이 잦아서 혈액이 변질될까봐 애를 태우는 경우가 많았다. 국립혈액원이 정상적으로 가동되고 있었다고는 하지만 시내 병원들에 필요한 혈액을 충분하게 공급해 주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때문에 백병원 혈액원에도 일반 병원들의 혈액 주문이 많이 들어왔다. 당초 혈액은행 설치의 목적이 자체에서 소요되는 혈액 확보를 위한 것이었으나 할 수 없이 다른 병원들에게도 다소의 혈액을 공급해 주기도 했다.

백병원의 혈액원은 국립혈액원에 앞서 우리나라에서는 처음으로 생겨난 사립병원의 혈액원이라는 점에서 매우 의의가 크다. 대개의 병원들이 국립혈액원, 그 후에는 적십자혈액원에서 필요한 혈액을 가져다가 사용하는 소극적인 방법을 택한데 비해 한 외과 전문의를 훈련시켜 혈액은행을 개설하고 자체에서 직접 혈액을 확보하는 적극적인 해결방법을 택한 백병원은 그 이후에 생겨난 많은 다른 사립병원 혈액원들의 표본이 되었다. (사진은 윤덕선 박사의 백병원 시절 외과 의사들과 간호사)

대한수혈학회 20년 발전사

국내에서 수혈의학은 1950년부터 시작된 한국전쟁중 미국 군인들에 의해 소개되었다. 당시 한국군의 군의관으로 김효규, 양학도, 김기홍, 강득용 등이 미육군병원에서 수혈에 관한 훈련을 받게 된 것이 우리나라 수혈의학이 도입된 계기이다.

정부에 의해서 1954년 6월7일에 국립혈액원이 개설되었고, 그 후 적십자혈액원(1957년 1월1일, 초대원장 손금성)으로 개편되었다. 그러나 이에 앞서 1954년초 민간병원으로서는 윤덕선 박사가 최초로 백병원에 혈액원을 개설하였다. (대한수혈학회 20년 발전사)

숨은 거인의 길 (윤덕선 박사 유고집)

윤덕선 박사가 남긴 글 "내 인생의 보람과 좌절"이란 수기에서는 민간병원 혈액원을 처음으로 개설했고, 이를 계기로 미국유학 생활중 병리학을 공부하게 된 연유를 아래와 같이 기술하고 있다.

미군 야전병원에서 일년간 임상병리와 보존혈액 공부

미국 군의관들이 우리병원에 자주 놀러 와서 수술하는 것도 보고 친해지면서, 그들이 쓰고 있는 보전혈액의 제조법을 배우게 되었다. 외과의에게 혈액은 절대적이다. 그 때만 해도 수혈이 필요할 때에는 직접 100cc 주사기(그것이 가장 큰 것이었지만)에 구연산소다를 5cc까지 용제(溶劑)로 넣고 각 혈액형에 맞는 혈액을 채혈해서 즉시 환자에게 수혈하는 방법밖에 없었다.

미군 121 야전병원(evacuation hospital)이 당시 대방동의 성남고교 자리에 있을 때, 매일 7시 미군버스로 출근하고 저녁에 퇴근하면서 근 일년 동안 임상병리도 배우고 보존혈액도 배웠다. 일주일에 한 번쯤 조선인 소속부대 KLO라는 곳에 가서 수혈도 하고 미군들의 헌혈도 받아 병에 보관하였다.일년을 다니면서 열심히 이거저것 배웠다. 그랬더니 121 야전병원의 원장과 의학부의 책임자가 상의해서 GMC 트럭으로 두 대 분량의 냉장고와 진공병 등 각종 임상병리검사용 시약을 실어다 주었다. 그래서 한국에서 최초로 혈액원을 창설할 수 있었다.

어찌된 영문인지는 모르지만, 후일 아무 관계도 없는 김희규 박사가 혈액원을 처음 만들었다고 서울시장으로부터 상을 받았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병리학 공부를 위해 미국유학

이제 꿈을 키워야겠다. 백인제 박사가 늘 말했듯이 한국에다 미국의 메이요 클리닉(Mayo Clinic) 같은 큰 의료기관을 만들어야 한다는 나 혼자의 야심에 불타고 있었는데, 가까웠던 미군들이 나보고 자꾸 미국에 가서 공부하라고 했다.

"너에게서 수술하는 재간은 있는데 의학지식이 부족하다. 그러니 꼭 유학가서 공부해라."고 하면서 코네티컷(Connecticut)주에 있는 브리지포트병원(Bridgeport Hospital)이 괜찮고 봉급도 좋은 편이니 가보라고 했다.

그래서 주머니에 동전 한푼 없으면서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이 미국 친구들이 외과수술 기술보다 나에게 필요한 것은 의학 지식이라면서 우선 1년쯤 병리학을 하라고 해서 유학이 시작되었다

미군 군의관의 권유로 윤덕선 박사는 한미재단(American-Korean Foundation)이라는 곳을 통해 유학생으로 선발되었고, 1954년 8월초 미국 코네티컷 브리지포트(Bridgeport) 병원에 유학생활을 시작한다. 당시 한미재단에서는 50명의 유학생 지원자중 2명을 선발했는데 그 중 한명이 윤덕선 박사이다. 미국으로 떠날 당시 부상항에서 선편으로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했고, 3박 4일 동안 대륙횡단열차로 뉴욕을 거쳐 코네티컷에 도착하는데, 임상병리학 발전에 크게 기여한 이삼열 교수(전 연세의대 임상병리학)도 같은 배를 타고 있었다.

 

 

 

참고문헌

  • 한국헌혈운동사. 1990
  • 대한수혈학회 20년 발전사. 대한수혈학회, 2003
  • 숨은 거인의 길. 소화, 2001
  • 주춧돌. 일송 윤덕선 선생 추모사업회. 1997

  

 

 [2003년 6월 20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