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엽을 밟으면서 -윤덕선 박사-

 

[편집자 주] 윤덕선 박사는 "낙엽을 밟으면서"라는 수상집에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 하셨다. "날마다 거울 앞에서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과연 나는 나의 참된 모습은 얼마나 알고 있으며 나 자신을 찾아보고 있을까, 인생의 많은 일들이 지나가면서 낙엽이 되어 발밑에 쌓인 70의 언덕길을 넘으면서 조용히 떨어진 잎새들을 생각해 본다." 그 분이 1921년에 태어나서 이제 암흑기에 겪었던 젊은 날을 회고한 1990년초 그 분의 글을 통해 가르쳤던 사상을 음미해 보기로 한다.

[2006-3-5 한림대의료원 부의료원장 조현찬]

독실한 가톨릭신자의 장남으로

 

 

 

 

세기적인 성악가 엔리코 가루소도 무대에서 노래를 부리기 15년후에야 비로서 자기가 노래 부르며 자기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고 한다.  날마다 거울 앞에서 나의 모습을 보면서 과연 나는 나의 참된 모습은 얼마나 알고 있으며 나 자신을 찾아보고 있을까, 인생의 많은 일들이 지나가면서 낙엽이 되어 발밑에 쌓인 70의 언덕길을 넘으면서 조용히 떨어진 잎새들을 생각해 본다.

윤덕선 박사는 1921년 평안남도 용강군 금곡면 우등리라는 곳에서 아버지 윤경순과 어머니 김경신 사이에 태어났다. 손위의 누님 한 분과 밑에 남동생 둘, 여동생 셋이 있어 7남매 중 둘째였다. 부모님은 독실한 카돌릭 신자였고, 부친은 광량만 염전의 바닷물을 끌어올리는 기관소 책임자로 오래 근무하셨다.

근검절약으로 집안을 어렵지 않게 꾸려나가면서, 연말이 되면 상여금과 저축했던 돈을 모아놓고 어머니와 같이 상의하여 외상값(주로 의료비)을 갚고 교회 헌금도 한 후, 남는 돈으로 농토를 사는 것을 인생의 재미로 하고 있었다. 나는 남자로서 맏이기 때문에 부모님의 극진한 사랑과 누님과 동생의 정성어린 돌봄으로 어린시절을 꽤나 행복하게 보냈다.

평양고등보통학교 시절

12살에 광량만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처음 기차를 타고 평양에 가서 평양고보 입학시험에 합격하여 그 때부터 하숙생활을 하면서 학교를 다녔다. 1학년 첫 학기는 시골학생들은 한복에 두루마기를 입어도 된다고 했으나 두루마기 동정에 때 묻는 것이 싫어서 동정 없는 두루마기에 고무신을 신고 한 학기를 다녔다.

2학기부터 여름 학생복에 운동화를 난생 처음 신어보고 신나하던 때가 지금도 생각난다. 학교성적은 그럭저럭 괜찮은 편이지만, 워낙 글 재주가 없었는데 교지에 수필 한 편을 응모했다가 담당 선생한테 많은 교정을 받았던 일이 생각난다. 평양고보 3학년까지는 한반 55명 중 40번 후반에 낄 정도로 키가 작았는데, 4학년 때부터 무럭무럭 키가 자랐다.

졸업반이 되었을 때 학교 선생님의 권유도 있고, 나도 원해서 만주에 있는 여순공과대학에 응시 하려고 했다. 이 대학은 당시 가장 입학하기가 힘든 대학 중의 하나였다. 그러나 부친께서 의사가 되라고 부득부득 고집을 피우지 않는 직업은 의사밖에 없으니 의학을 공부하라고 하셨다. 처음에는 경성제대 의학부 예과를 지원하려고 했다. 그러나 우리 마을에 아주 가까이 지내는 성공한 개업의사가 사는데 그분이 경성의전을 나오셔서 나보고 이 학교를 지원하라고 권유하셨다. 수업년한도 경성제대보다 2년 짧고, 등록금도 싸다는 것이다. 그래서 경성의전에 응시했는데 나의 기대와는 달리 엉뚱하게 낙방을 하고 말았다. 부득이 집에서 쉬면서 많은 것을 생각하게 되었다.

자신을 과신했던 교만함에 대해 후회를 했고, 또 다 자란 놈이 부친이 벌어다 주는 것을 그냥 먹고 재수라는 낭인생활을 한다는 것은 나의 양심이 허락지 않았다. 생각 끝에 자전거 뒤에 "지까다비"라는 노동화 신발, 장갑, 수건 등 잡화를 싣고 염전을 돌아다니며 염부를 상대로 행상을 했다. 그런대로 돈버는 재미도 보았다.

10월에 접어들어 다음 해 입학시험이 다가오니 다시 공부를 해야겠기에 평양에 다시 가서 낭인생활을 하는 친구들을 찾아가 같이 하숙하며 도서관에 다녔다. 어느새 친구들은 담배를 모두 피우고 있었고, 술도 곧잘 하는 데 놀랬다. 가만히 생각하니 이러다가 공부도 못하고 술, 담배만 배우겠다는 걱정으로 다시 시골집으로 돌아와 책과 씨름하게 되었다. 그 때 평양에서 낭인생활을 하던 친구 중에는 숭실대  교수를 지낸 안병욱 형도 들어 있었다.

경성의학전문학교 생활

이듬 해 경성의전에 다시 응시해서 다행히 합격하여 입학이 되었다. 의예과 과정이 없는 의학 전문과정의 부족한 것을 보충해야겠다고 많은 의쿠라타 모모조, 우찌무라 칸조 등의 철학에 심취한 일도 있고, 금서였던 마르크스의 <자본론>, 아담스미스의 <자본론>, 맬더스의 <인구론>, 다윈의 <종의 기원> 등을 탐독했고, 세계문학전집, 한국문학전집도 읽었다. 심훈의 <상록수>, 이광수의 <흙>과 <사랑>은 나에게 많은 감명을 주었다. 책이란 책은 모조리 읽는다고 생각하고 있었고, 의학전문학교의 고된 수업과정에서도 몇 명 안되는 한국인(당시에는 반도인이라 불렀다) 학생들의 모임인 축구부에도 들어가 열심히 뛰었다.

이렇게 나의 학창시절과 젊음을 일본 제국주의 군국식민지 통치하에서 교육받았으니 인생의 기초가 될 젊은 시절은 넓은 시야에서 많은 것을 흡수하지 못하고, 외골수로 굳어 버린 그야말로 일제의 잔재라는 표본인생을 살았던 것 같다. 그러나, 지나고 보면 그 나름대로 1년간의 낭인생활이 어느 정도 삶의 유연성을 가져다 주기도 했고, 학창시절에 사귀었던 많은 친구들과 운동과 술이 외골수로 빠지려는 나를 붙잡아 주기도 했으며, 일제 식민지 치하에서 민족 독립을 위한 저항정신도 나에게 신념과 용기를 준 것으로 생각한다.

수많은 책들을 탐독하고

  낙엽을 밟으면서 삶의 참된 모습을 생각

8ㆍ15해방은 내 인생에서 가장 큰 흥분과 기쁨을 주었고, 북한의 붉은 정권의 시작과 남한의 정치사회의 혼란은 내 인생의 향로를 바로 잡아 보려는 노력에 큰 영향을 주었다. 6ㆍ25전쟁을 처참하게 겪으면서 살아남았고, 또 엄청난 혼란의 와중에서도 북에 계시는 부모님과 우리 7남매가 한 사람의 손상도 없이 모두 다시 모여 건강하게 살고 있음은 내가 또 한번 깊은 감사를 하느님께 드리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 4ㆍ19혁명 때는 의과대학 학생들을 이끌고 당시 경무대 앞까지 진출하며 자유를 외쳤고,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았다.

6ㆍ10항쟁, 6ㆍ29선언, 6공화국을 거치는 동안 대학을 세우면서 학생운동을 이해하려고 많은 책을 읽었다. 매달 베스트셀러는 빠뜨리지지 않고 탐독했고, 민중운동을 이해하려고 노력도 했으며, 김일성 주체사상과 모하마드 가다피의 알파타 혁명이론도 읽었고, 해방신학도 공부해 보았다. 교육사업에 인생을 마치게 되니 숱한 교육에 관한 책을 읽게 되었고, 병원을 위시한 기업경영에도 많은 관심을 가지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러는 동안 70의 고개를 넘게 되어 낙엽을 밟으면서 나의 삶의 참된 모습은 어떤 것인가를 열심히 들여다보지만 무엇인가 점점세월의 물살에 밀려서 멀어져 가는 느낌은 숨길 수 없음이 안타깝기만 하다. 부친은 87세에, 모친은 98세에 타계하셨고, 아직 손위 누님이 계시고, 동생들이 다 건강하지만, 부모님을 저승에서 만나 뵙고 먼저간 친구들과 다시 만날 날이 머지 않음을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요즈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