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하마드 깐슈   ‘정수일’에 대한 관심

 



정수일씨가 번역한 <이븐 바투타 여행기>에 실린 그의 약력을 잠시만 훑어보자. 중국 연변에서 출생해 연변 고급중학교와 베이징대학 동방학부를 졸업한 정씨는 이집트 카이로 대학 인문학부 연구생으로 수학했고, 중국 외교부와 모로코 주재 중국대사관에서 근무했다. 조국인 북쪽으로 돌아간 뒤에는 평양국제관계대학과 평양외국어대학 동방학부 교수를 지냈고, 튀니지대학 사회경제연구소 연구원과 말레이대학 이슬람아카데미 교수로 있었다. 남쪽으로 온 뒤에는 단국대 대학원 사학과 박사과정을 마친 뒤 같은 대학 사학과 교수로 재직했다.

험난했던 그의 삶 전 과정에서 그가 초지일관 몰입한 것은 동서문화교류의 역사에 대한 연구였다. 지난 92년 ‘무함마드 깐수’란 이름으로 펴낸, 500쪽이 넘는 방대한 연구서인 <신라·서역 교류사>는 이 분야에서 개척자 구실을 한 문제작이었다. 그는 연구 범위를 좀더 확장해 동서 교역사에 관한 원고를 집필하던 도중,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지난 97년 구속됐다. 이른바 ‘깐수 사건’으로 알려진 이 사건으로 실형을 선고받고 지난해 풀려날 때까지 5년 동안 수감생활을 하면서 그는 초인적인 작업을 진행했다. 자료도 빈약하고 원고지조차 모자라 뒷면에 스스로 줄을 그어 사용해야 하는 열악한 환경에서 그는 <…여행기>의 번역뿐 아니라 <실크로드학>과 <세계문명교류사> 등과 같은 굵직굵직한 연구서를 집필했다. 이 때의 심경을 정씨는 이번에 펴낸 <…여행기>의 ‘옮긴이 후기’를 통해 이렇게 토로했다.

“한증탕 같은 여름철, 더덕더덕 땀띠 돋아난 엉덩이를 마룻바닥에 붙이고 하루 열댓 시간씩 뭉개면서 내내 생각한 것은 유배 생활 18년간 5백권의 저서를 남긴 다산 정약용 선생이었다. 선생은 줄곧 앉아서 너무 오래 글을 쓰다보니 엉덩이가 짓뭉개져, 벽에 선반을 매고 일어서서 글을 썼다고 한다. …선현들의 불요불굴의 의지와 실천은 이 책의 번역과정에서도 내내 옮긴이의 귀감이었다.”

그가 한 때 가명으로 사용했던 ‘깐수’란 이름은, 이슬람 세계에서 신라에 관한 최초의 기록을 남긴 지리학자 이븐 쿠르다지바의 <여러 도로와 여러 왕국에 관한 기록>에 등장한다. 쿠르다지바는 신라의 위치를 설명하면서 “중국의 맨 끝 깐수의 맞은 편”이라 기록했다. 정씨는 <신라·서역 교류사>에서 이 문제에 관해 18쪽에 걸쳐 매우 상세히 고증했다. 이를 통해 정씨는 ‘깐수’가 중국의 ‘강주’ 또는 ‘항주’라는 설을 반박하고, 신라 영내의 ‘강주’를 가리킨다는 설을 설득력 있게 제기한 바 있다. [2001년 9월22일]

 

 황석영 특별기고 ..... 내가 만난 '깐수'

 

―한 지식인의 운명에 대하여

지식인에 대한 존재의 규명에서 사르트르는 지배계급에 의해 실용 지식 전문가가 된 사회적 노동자가 동일한 모순을 여러 수준에서 괴로워하기 시작하면서 진정한 지식인으로 태어난다고 말한다. 지식인이란 자기 내부와 사회 속에서 구체적 진실, 또는 그것이 지니고 있는 모든 규범에 대한 탐구와 지배하는 힘의 이데올로기 사이에 대립이 존재하고 있음을 깨달은 사람이다. 그리고 그는 이렇게 결론을 내리고 있다.

“분열된 사회 속에서 만들어진 지식인은 그가 사회의 분열된 모습을 내면화한 까닭에 그 사회를 증거해 주고 있다. 그러므로 그는 역사적 산물인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볼 때, 어떤 사회도 자기 자신을 비난하지 않고는 그 사회의 지식인들에 대해 비난할 수 없다. 왜냐 하면 지식인이란 결국 그 사회가 만들어낸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오늘 이렇듯 진지하게 지식인에 대한 서구식의 고전적인 질문을 되씹는 것은 다름아닌 어느 동시대 사람 한 분을 모두에게 소개하고 싶어서다.

그의 이름은 정수일, 1934년 만주 옌지(연길)에서 태어나고 성장했다. 한때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이른바 `깐수 사건'의 주인공이다. 그는 일찍이 전 중국에서 수재만을 뽑는 베이징대학 동방학부를 수석으로 나온 사람이며 제3세계에서의 지도력을 행사하려던 중국 정부에 의하여 발탁된 사람으로서 중국 국비장학생 1호가 되었던 이였다. 중국 탕자쉬엔 외교부장은 그의 동기생이다. 정 선생은 이집트와 모로코에 유학했고 중동에서 외교관으로 활동했다. 그는 동서 교역사와 실크로드학의 권위자가 되었으며 우리말에 중국어 일본어 영어, 그리고 전공인 아랍어와 포르투갈어 위구르어 티베트어 몽골어 등등 거의 열두 개 나라의 고대 언어에 정통하다.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어느 중국 고위층은 그의 재주를 아껴서 인척 여성과 결혼을 시키려고 하였지만, 그는 귀국을 결심하게 된다. 당시 그의 조국은 분단된 한반도의 북쪽인 조선을 의미하였다.

그는 중앙당으로 소환되고, 연구하는 학자가 아니라 공작원으로 변신하게 된다. 십이개 국의 언어를 유창하게 구사할 수 있고 박학다식하다는 것은 국가 권력의 다급한 총동원령에 따라서 그 효용 가치가 엉뚱한 방향으로 결정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는 그렇게 동원되었다. 중국 국적에서, 북조선 국적, 그리고 레바논 국적 등등 네 번의 `세탁'을 거쳐서 그가 취득한 최종 국적은 필리핀 체류 아랍인 2세가 되어 버렸다. 그의 아랍 이름이 동방 교역지의 하나였던 `깐수'가 된 것이 그 때문이다. 그는 여러 민족의 언어에 능통하고 박학한 실력 때문에 누구의 의심도 받지 않고 모 대학의 교환교수로 정착했다. 나는 남북 분단체제에서 벌어진 음습하고 피 냄새 나는 첩보전에 대하여 상세히 알지는 못하지만 어느 정도 눈치는 채고 있는 사람이다. 그래서 십여 년의 우여곡절을 겪을 때에도 `곰팡이'가 끼어들지 않도록 철저하게 `햇볕 아래 공개'하는 원칙을 세웠었다. 발표에 의하면 그의 상부 선은 구체적인 활동을 요구했고 그는 하는 수 없이 어느 월간지에 나온 것들을 팩스로 중국에 보냈다. 그야말로 원시적인 행위였던 셈이다. 그래서 세상이 떠들썩하게 `깐수 사건'이 일어나게 된다. 그는 직업 공작원이었으므로 그가 겪은 외로움과 고초는 우리네 진보인사가 받은 것과는 달랐을 것이다.

이 다음부터 실로 감동적인 지식인의 자기 결단과 선택이 이루어진다. 그는 국적이 필리핀이었으므로 국제법상 국외추방을 요구할 수 있었고 그가 처음에 갇힌 곳은 출입국과 관세법 위반자들이 수감되는 곳이었다. 그러나 정 선생은 자기의 국적은 분명히 북조선임을 주장한다. 그리고 최고형을 받게 된다. 그는 안정된 학문 탐구의 짧지 않은 세월을 남한에서 보내는 동안 중요한 저서와 논문들을 남겼고, ―그가 검거되기까지 자신의 진짜 신분을 밝히지 못하여 지금도 미안해하는― 부인도 얻게 되었다. 그녀는 사실은 정 선생이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 헤매이다 갖게 된 서재의 `지킴이'였다. 그는 방대한 자료와 주를 붙인 <동방교역사>의 원고 마지막 부분을 손질하다가 잡혀왔고 검사는 취조 중에 그 사실을 알게 되었다. 검사는 그의 마지막 원고를 관계 기관에서 찾아다가 검사실에서 정리하도록 충분한 시간을 주었다. 이 원고의 중요한 가치를 검사도 알았던 것이다. 그는 정 선생에게 사형을 구형하면서 눈물을 흘렸다. 변호인단은 물론이고 재판부도 그의 곡절 많은 삶과 오랫동안 단절될 수밖에 없는 연구의 성과를 안타까워하면서 과거에 비할 수 없는 7년형을 주었다. 그리고 그는 전향했다. 그는 자신의 다른 길을 발견했던 것이다. 그에게는 전민족에 봉사할 시간이 별로 많이 남아 있지 않았다.

그는 내가 그랬던 것처럼 메모일 뿐이라고 주장하면서, 법무부 노트에 깨알 같은 글씨로 자료도 변변치 않고 조명도 좋지 않은 독방에서 아내가 들여주는 최소한의 책들과 기억을 더듬어 가며 저술을 시작했다. 노트로 거의 사백여 권에 이르는 집필을 그는 수감된 5년 동안에 해냈다. 예전 같으면 어림도 없었을 작업이었지만 그는 마지막 설득 과정에서 이들 노작들을 감옥 밖으로 고스란히 보존해 내올 수가 있었다.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보다 더욱 전문적이고, 거의 박물적 지식을 겸비했던 중세 이슬람의 학자이며 여행가였던 이븐 바투타의 여행기 <도시들의 진기함, 여행의 경이 등에 대하여>를 세계에서 처음으로 초역해 냈다. 이것은 책으로 네 권에 이르는 방대한 저술이며, 중세시대 동방의 문화와 문명을 올바르게 자리매김할 귀중한 책이다. 알제리에서 바투타의 기록이 처음 발견되었고 프랑스가 이를 입수하여 식민지 경영에 필요한 만큼 요약하여 번역한 것이 유일하다고 한다. 이븐 바투타의 13만㎞에 이르는 30여 년의 여정은 동아시아의 근대와 문명에 대하여 깊이 성찰해야 할 이 시기에 절실히 필요한 자료가 될 것이다.

그는 이 외에도 서구인의 눈으로 본 동방세계에 대한 명저인 <율>과 당국의 양해로 간신히 보존한 <동방교역사>, 그리고 <동방교역사전>, 북한에서부터 해왔던 <아랍어 사전>을 보완 정리해 냈다. 나는 그의 노트와 그가 꼼꼼하게 그려낸 지도를 보면서 눈물이 나왔다. 그것은 구치소에서 휴지로 나누어 주던 손바닥만한 백지를 밥풀로 붙여서 만든 종이였는데 거기다 이븐 바투타가 여행한 육로 및 해로를 붉고 푸른 볼펜으로 정성스럽게 그려 놓았다. 이것을 어찌 그람시 선생의 <옥중수고>에 비길 것인가. 그는 그를 아끼고 키워 주었던 큰 나라 중국의 엘리트로 편안한 학문 생활을 하면서 더 높은 업적을 쌓을 수도 있었다. 조국의 북과 남은 이 소중한 재보를 헌신짝 같이 다루다가 결국은 말살해 버릴 뻔하였다. 아아, 참으로 다행한 일이다. 과거에 얼마나 수많은 아까운 자산들이 그렇게 이름없이 말살되었던 것일까. 우리는 반세기 만에 겨우 이러한 것들을 추스를 만큼의 아주 작은 여유를 남북의 변화를 통하여 확보할 수가 있었다.

그는 8·15 사면으로 풀려나와 다시 학문에 정진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국적이 없어져 버렸다. 여기서 다시 그의 고뇌와 선택이 시작되었다. 그는 `대한민국 국적'을 신청한다. 그에게 이미 남이나 북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며, 그이 말처럼 얼마 남지 않은 시간에 “민족 앞에 밥값이라도 하려면” 자신의 구상을 빠짐없이 집필해 내야 하는 것이다. 그는 나와 헤어지기 전에 젖은 눈으로 중얼거린다. “분단시대의 지식인은 수의환향(囚衣還鄕)이 자신의 길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북으로 돌아가는 장기수 선생들에게도 인사를 드리고 싶다는 것이었다. 나는 또한 그분들의 삼사십년에 걸친, 너무나도 길어서 추상적인 세월이 되어버린 어둡고 비좁은 독방의 삶을 다시 생각한다. [2000년 8월30일  소설가 황석영]

 

  스물여섯에 14세기 3대륙 바람처럼 떠돌다



 

“인류가 배출해낸 가장 위대한 여행가”라 해도 지나치지 않을 14세기 이슬람의 법률가 이븐 바투타(1304∼1368)의 여행기가 정수일(67) 전 단국대 사학과 교수의 번역으로 출간됐다. 이 책의 본디 아랍어 제목을 직역하면 ‘여러 지방과 여로의 기사이적을 본 자의 진귀한 기록’이지만, 일반적으로 <이븐 바투타 여행기>라 알려져 있기 때문에 옮긴이는 이를 제목으로 삼았다.

이븐 바투타의 본명은 ‘아부 압둘라 무함마드 븐 압둘라 븐 무함마드 븐 이브라힘 알 라와티’다. 모로코 왕국 서북단의 국제무역항 탄자에서 태어난 그의 삶에 대해서는, 스물여섯 살에 집을 나서 이후 30년 동안 아시아·유럽·아프리카 세 대륙에 걸쳐 10만㎞의 여정을 바람처럼 떠돌았다는 사실 이외에 더 알려진 바가 없다.

이븐 바투타는 당시의 교통수단으로 한 사람이 평생 다닐 수 있는 물리적 거리의 한계에 이르기까지 여행을 멈추지 않았다. 그의 여행기가 위대한 것은 이런 물리적 거리 때문만은 아니다. 그는 천성적으로 방랑벽을 타고났을 뿐 아니라, 보고 듣고 느낀 점을 가능한 한 가장 구체적인 표현으로 기록에 남기는 꼼꼼한 기록광이기도 했다.

서방세계가 애써 외면한 기록

그의 여행기는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과 더불어 중세 동서교류사에 관한 가장 중요한 자료다. 그러나 마르코 폴로의 저작은 판본이 140종에 이르고 내용 또한 자신이 직접 체험한 기록이라기보다 전해들은 이야기를 잡다하게 모아놓은 것인 데 반해, 이븐 바투타의 것은 자신이 직접 여행하면서 관찰하고 체험한 내용을 실록한 것이라는 점에서 자료적 가치가 월등하다. 그럼에도 서방 세계에서는 ‘이슬람’의 시각에서 본 동서교류사라는 점에서 이 저작을 애써 외면해왔다.

이븐 바투타가 태어난 모로코 왕국은 당시 아시아·아프리카·유럽 세 대륙에 걸쳐 있던 이슬람 세계의 서쪽 끝에 자리했다. 어려서부터 철저한 이슬람 교육을 받아 독실한 무슬림(이슬람교 신도)으로 성장한 그는 21살 때 무슬림의 5대 종교적 의무 가운데 하나인 성지순례에 나서면서, 어렴풋이 ‘길떠남’이 그의 운명의 한가운데 자리하고 있음을 느낀다. 알렉산드리아에서 만난 수행자 이맘 부르한이 여행을 좋아하는 그에게 “인도와 중국에 있는 나의 세 형제들에게 안부를 전해달라”는 말을 했을 때, 이븐 바투타의 역마살 낀 상상력은 그 순간 인도와 중국 같은 머나먼 이역 또한 자신의 여로에 포함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 후 그는 계시를 실천에 옮기기라도 하듯 실제로 인도와 중국땅을 밟았으며, 각지에 흩어져 있던 이맘 부르한의 세 형제를 모두 만나 그가 부탁받은 안부를 전했다. 이 위대한 방랑객은 인도에서 8년 동안 머물며 그곳의 법관을 지냈고, 인도 술탄의 특사로 원나라의 마지막 황제인 순제 치하의 중국 베이징을 여행할 수 있었다.

그의 여행은 모로코의 탄자를 출발해 이집트-서아시아-중앙아시아-인도-동남아시아를 거쳐 중국의 한발리크(베이징)까지 다녀온 ‘동행’, 모로코의 수도 파스를 출발해 지브롤터 해협을 건너 이베리아 반도의 마지막 이슬람 왕조인 나스르조의 수도 가르나투아(그라나다)까지 갔다가 모로코 남부 마라케시를 돌아 파스로 귀환한 ‘북행’, 파스에서 다시 남하해 사하라 사막을 횡단한 뒤 수단 등 내륙 아프리카까지 왕복여행한 ‘남행’의 세 부분으로 나뉜다.

그의 여행기는 당대의 수많은 실존 인물들을 정확히 소개하고 있다는 점에서 일종의 작은 역사인물 사전이며, 이질적인 여러 문명세계를 관통하면서 풍부한 정보를 기록으로 남김으로써 “그 자체가 일종의 정신문명 교류의 표상이자 촉진제”가 되었다고 옮긴이는 평한다. 정보전달의 정확성으로 보나 수사학적 완성도로 보나 “여행문학의 좌표를 세운 수작”이란 평가 또한 조금도 지나치지 않다.

문학어 맛 살린 철저한 완역

옮긴이는 이 불가사의한 여행기를 번역하면서 “완역의 최대치를 도모”하겠다는 야심찬 계획을 세웠다. ‘문학어’인 중세 아랍어 특유의 맛과 운율을 살리기 위해 필요에 따라선 낯선 한자어를 섞어썼으며, “일언반구의 빠뜨림”도 없는 완역을 기하기 위해 일쑤 다른 초역본에서는 생략하기 마련인 아랍어의 상투적 문구들(“인샬라” 따위)조차 그대로 옮겼다. 여기에 이 고문서를 현대인이 읽기에 불편하지 않도록 1천여 항목에 이르는 고유명사·문물 등에 관한 옮긴이의 풀이를 덧붙였다. 특히 이슬람세계의 생각과 마음에 대한 이해를 도울 수 있는 항목은 매우 토착적인 설명을 더해 우리 독자의 이해를 도왔다. 가령 ‘알라신께서 원하신다면’이란 뜻의 ‘인샬라’란 말에 대해 “‘진인사하고 대천명한다’고 할 때의 ‘대천명’과 비슷하다”고 설명하는 식이다.

또 이븐 바투타의 행적을 25장의 세부 지도로 그려 해당 장의 앞에 싣고, 그의 전체 행로를 나타내는 지도와 이를 마르코 폴로의 그것과 비교한 지도 두 장을 책 끄트머리에 덧붙였다. 이 지도들은 그가 감옥에 갇혔을 당시 지급받은 ‘관지’(감옥용 휴지) 열두 조각을 풀로 붙여 그 위에 빨강색과 파랑색 볼펜으로 정밀하게 그린 것이다.

이븐 바투타의 여행기는 한동안 잊혀졌다가 1808년 알제리에서 아랍 탐험가 시첸에 의해 처음으로 필사본이 발견됐다. 1829년 영국의 새뮤얼 리가 초역본을 냈고, 1858년 프랑스의 데프레메리와 상귀네티가 처음으로 완역하여 파리에서 출간했다. 이후 영어(H.A.R.깁 옮김, 1929), 일어(마에지마 신지 옮김, 1953), 중국어(마진펑 옮김, 1985) 등 세계 15개 국어로 번역됐으나 모두 간추린 번역에 그쳤고, 완역은 프랑스어 번역 이후 정수일씨의 작업이 두 번째다. 옮긴이는 ‘옮긴이 서문’에서 “이제 우리는 번역 분야에서도 남들과 눈높이를 견주어야 한다는 시대적 사명감에 새삼 가슴벅차다”는 말로, 이 방대한 작업에 대한 자부심의 한 귀퉁이를 드러내고 있다. [2001년 9월22일   한겨레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