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약분업 1년반] 왜곡되는 의료인력 수급

 
## '버는 科'에만 레지던트 몰려…개원가능성이 최대 기준 ##

최근 전공의(레지던트)를 뽑은 서울대병원 교수들은 인턴들의 지원 현황을 보고 깜짝 놀랐다. 의대 졸업성적 1·2·4위가 대거 안과에 지원했기 때문. 전통적으로 성적우수자들의 지원 1순위였던 내과는 의대 졸업성적 10위권이 최고 성적의 지원자였다. 교수들은 “아무리 돈이 좋더라도 이건 곤란하다”며 “의약분업이 이런 결과를 낳을 줄 몰랐다”고 말했다. 고려대병원 흉부외과 선경 교수는 의대생이나 인턴을 만나면 누구에게든 흉부외과 지원을 권유했다. 소속 과가 ‘기피 대상 1호’란 걸 누구보다 잘 알기에 ‘찐한’ 술 접대는 필수 코스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올해 전공의 확보율은 60%. 5명 정원에 3명을 확보하는 데 그쳤다.

의약분업 이후 ‘개원 가능성’이 전공 선택의 최대 기준으로 떠오르는 탓에 개원 가능성이 거의 없거나 낮은 흉부외과·진단방사선과 등에 지원하는 발길이 뚝 끊겼다. 이 때문에 전문의 양성에 차질이 빚어지고 있다. 충북대병원 흉부외과 홍종면 교수는 “의약분업 이후 지금껏 한 명의 전공의도 못 뽑았다. 서울대병원과 세브란스병원조차 미달 사태가 빚어지는 바람에 지방 대학에선 아예 전공의 뽑을 엄두도 못 낸다”고 말했다.

서울 S병원 진단방사선과 이모 교수는 “교수 자리를 은근히 제시하며 권유했지만 소용없었다”며 “언제부턴가 ‘돈’이 의대생 전공 선택의 유일한 기준이 됐다”고 말했다. ‘돈’에 관해선 의대교수들도 별로 할 말이 없다. 의약분업 직전인 2000년 봄, 강남성모병원 안과 교수 전원이 집단 사퇴하고 개업한 것을 신호탄으로 안과와 피부과·이비인후과·성형외과·비뇨기과 등의 교수들이 줄줄이 사표를 내고 개원가로 뛰어들었기 때문이다. 이비인후과의 경우 전국 대학병원 교수 150여명 중 50여명이 의약분업 이후 개원했다.

의약분업 이후 의대 교수의 개원 러시는 병원·종합병원 봉직의사에게도 이어져 병원급 이상 의료기관의 심각한 인력난·경영난을 초래했다. K의대서 나와 이비인후과를 개업한 최모 교수는 “의약분업이 교수들의 발걸음을 ‘명예’서 ‘실리’로 옮겼다”며 “대학병원마저 경영난을 이유로 교수들에게 수익 올리기를 강요해 사표를 썼다”고 말했다.

의약분업 이후 2000여명이 가세한 개원가에서 인술의 입지는 갈수록 축소되고 있다. 화두(화두)는 단연 ‘마케팅’과 ‘경영’이다. 안과·성형외과·피부과 등 이른바 ‘미용 과목’ 개업의들의 경쟁은 ‘제로 섬’ 게임처럼 치열하고 절박하다. 최근 30억원 정도를 투자해 미용 관련 의원을 두 곳 개설한 박모씨는 “살아남기 위해 지난해 마케팅비만 10억원 가까이 썼다”고 말했다.

의약분업이 ‘환자’ 대신 ‘고객’, ‘의술’ 대신 ‘경영’이란 표현을 더 자연스럽게 만든 것이다. 덕분에 의약분업 이후 의료계에선 요즘 병원 컨설팅사와 홍보 대행사가 자고 나면 하나씩 늘 정도다. 개원의들 간의 ‘인수합병’은 대세로 받아들여지고 있으며, 마케팅과 홍보 등을 공동 관리하는 프랜차이즈 의원도 크게 늘고 있다. 최근엔 국내 굴지의 재벌그룹까지 막강한 자본력을 앞세워 개원의사들의 전쟁에 뛰어들 조짐이다. 전국 곳곳에 ‘브랜드 클리닉 타운’을 조성하겠다는 것이다. 5개의 프랜차이즈 피부과 의원을 개설한 박모(38)씨는 “외국의 거대 자본이 밀어닥치면 영세한 우리 의료계가 치명타를 입게 된다”며 “의사들의 경영 마인드를 나쁘게만 봐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약국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4조6000억원 정도로 추정되는 건강보험 급여비의 60%를 상위 20%의 약국이 가져감에 따라(대한약사회 신현창 기획실장) 빈익빈부익부 현상이 심화되고 있다. ‘목 좋은 곳’에 있는 약국은 권리금만 2억~4억원 정도로 천정부지로 뛰어올랐고, 매출액이 100억원에 육박하는 ‘기업형 약국’도 생겨났다. 덩달아 약사들의 ‘몸값’도 높아져 150만원 수준이던 대졸 약사 초임이 200만~250만원으로 높아졌다.

서울중앙병원 피수영 부원장은 “우수한 의사들이 ‘메이저과(내과·외과·산부인과·소아과)’를 기피하고 돈 버는 곳으로만 몰리는 상황이 지속되면 먼 장래에 심각한 문제를 초래할 수 있다”며 “그러나 현재의 광풍을 잠재울 방법이 없다는 게 의료계와 우리 사회의 고민”이라고 말했다.

[2002년 1월18일  조선일보]

   원자력병원 기초과목 전공의 확보못해 2차 의료기관으로 전락

 

암전문병원으로 대형병원급인 한국원자력병원(서울 노원구 공릉동)이 해부병리과, 방사선과 등 기초과목 전공의(인턴ㆍ레지던트)를 한명도 확보하지 못해 중소병원으로 전락하게 됐다. 이는 기초과목 전공의 부족이 의료 위기를 초래할 것이라는 우려가 나오는 가운데 빚어진 현상으로 향후 ‘제2의 원자력병원’이 속출할 가능성이 높아 대책 마련이 시급하다는 지적이다.

보건복지부는 24일 병원체계상 최상위의 3차 진료기관(종합전문요양기관)인 원자력병원이 내달 말까지 임상병리, 해부병리, 진단방사선, 마취, 소아과 5개 과목에 대한 전공의를 확보하지 못할 경우 2차 의료기관으로 병원등급의 하향조정이 불가피하다고 밝혔다. 이에 따라 원자력 병원은 의료수가 적용비율도 5%정도 불이익을 받아 연간 15억여원의 수익 차질을 빚을 것으로 전망된다. 전공의 부족으로 병원등급이 떨어지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원자력병원은 암 환자가 다른 병원에서 치료를 받다 오는 경우가 많아 ‘4차 진료기관’이란 별칭이 붙을 만큼 독보적인 입지를 가진 암전문 종합병원. 하지만 의료법은 3개 과목 이상 전공의(3년차 이상)를 한명 이상 확보하지 못한 3차 의료기관은 자격을 상실하도록 규정돼 있어 중소병원 전락이 불가피하다.

기초과목 전공의 부족은 다른 국ㆍ공립 병원도 마찬가지로 전문의가 전공의 역할을 대신할 만큼 심각한 상황이다. 3차진료기관인 국립의료원 역시 지난해까지 3년차 이상 전공의가 필요한 8개 필수과목중 임상병리, 해부병리, 마취과 전공의를 구하지 못해 등급하락 위기를 겪다 마취과 전공의를 겨우 충원, 등급조정 위기를 넘겼다. 국민건강관리공단이 운영하는 일산공단병원도 임상병리, 해부병리, 진단방사선과 전공의를 구하지 못해 전문의들로 꾸려가고 있는 형편이다.

원자력병원 이규정(李揆政) 기획실장은 “기초과목 전공의 지원이 (필요한 인원의) 50%대에 불과한데다 국ㆍ공립병원은 급여수준도 낮아 전공의 확보가 더욱 어렵다”고 말했다. 의협 주수호(朱秀虎) 공보이사는 “의료수가가 낮은 기초과목 전공을 기피해 수련의들이 재수, 삼수를 마다하지 않는 상황에서 기초과목에 대한 정책적 배려를 하지 않는다면 심각한 의료위기가 올 것”이라고 전망했다.

[2002년 5월 27일  한국일보]